나는 어쩌다가 부자가 되었나

취미부자 말입니다. 헤헤

by 박기복

어제 아침의 일이다. 남편이 출근하며 가방을 챙겼다. 늘 맨몸으로 출근하던 사람이 갑자기 가방을? 사연인즉 직장 후배와 당일 출장이 있는데 일을 일찍 마치고 함께 수영장에 가기로 했단다. 후배가 마침내 익힌 수영 실력을 남편 앞에서 뽐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남편은 나름 수영을 잘한다.) 수영 이야기를 어지간히 자주 했구나 싶어 속으로 살짝 웃었다.


하여 후배와 수영장에 다녀온 남편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그는 6개월간 초급반에서 수영을 배웠는데 같은 반 멤버들 중 자타공인 '최하위권'을 전전하면서도, 꾸준히 수영을 배우러 다녔고 최근에서야 비로소 헤엄을 칠 줄 알게 되었단다. 잘하는 수영은 아니더라며 냉정한 평을 남겼지만 정작 남편이 하고 싶은 얘기는 포기하지 않고 다닌 게 정말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후배의 끈기와 인내를 강조한 것은 어쩌면 나를 겨냥한 뾰족한 공격일 터였다.


지금껏 두 번 정도 수영 강습을 시도했는데 양상은 같았다. 한두 달 강습을 신청해서 중간중간 수업을 빼먹고는, 늘지 않는 실력에 좌절하며 배우기를 포기했던 것이다. 수강생들이 물속에서 줄지어 나아가는데 나로 인해 정체가 발생할 때의 그 아찔한 수치심이란. 수영과 나의 이야기는 물에 간신히 떠 있는 선에서 막을 내렸다.


그러고 보면 수영만이 아니었다. 의욕적으로 시작했다가 슬그머니 접었던 취미들이. 72색 색연필과 종류별 스케치북을 사서 그림을 배웠다. DSLR 붐이 일었을 땐 일명 '사백이'를 장만하고 한겨레 문화센터까지 사진강좌를 들으러 다녔다. 바이올린은 동요를 낑낑대며 연주하는 선에서, 피아노는 디지털피아노를 사들여 조금 뚱땅거리다 마는 선에서 열정이 식어버렸다. 탁구는 무려 올림픽 메달리스트로부터 강습을 받았고 배드민턴은 동생에게 라켓을 사줘 가며 즐겼던 시절이 있었더랬다. 지금은? 온갖 도구들만이 유물로 남았을 뿐이다. 이 정도면 (과거형) 취미부자라 할만하지 않은가.


한 가지에 몰두했다면 이것저것 기웃거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다방면에 호기심은 있으나 진득하게 이어갈 인내심은 없었던 것이 취미부자의 속사정이다. 인내심이 바닥나는 상황은 연습을 반복하는 일의 고됨이 아니라 실망감을 견디는 데서 주로 발생했다. 쉽게 실망했고 한 번 실망해 버리면 타격감이 꽤 컸다. 이거 안되네, 잘 못하네 싶으면 노력해서 잘하게 만들면 될 텐데. 아무렇지 않은 척 실망감을 툭툭 털어내기가 쉽지 않았고 굳이 견디고 참아내기엔 고작 취미일 뿐이었다. (밥벌이엔 잘 참는 편)


몇 번 얼굴을 본 적 있는 남편 후배를 떠올려 본다. 월수금반, 화목반을 동시에 수강하는데도 헤엄치는 일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고, 아무리 허우적대도 도통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어떤 마음이면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남들이 세차게 팔을 휘저으며 자기를 추월해 나갈 때, 다들 두 바퀴를 도는 동안 한 바퀴를 돌면서도 훼손되지 않는 열정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공이산. 직역하면 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의미이고 쉬지 않고 꾸준하게 한 가지 일만 열심히 하면 마침내 큰 일을 이룰 수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고사에 등장하는 90세 노인인 우공(愚公)은 정말로 산을 옮겼을까? 자자손손 대를 이어 흙을 퍼 날라 산을 옮기겠다는 그 뚝심과 정성에 감동한 옥황상제의 도움으로 산이 뚝딱 옮겨지게 되었단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로 이어지기까지.


이제야 알겠다 하면서 자연스럽게 숨이 쉬어지는 순간에 너무 기쁘더래 라며 남편이 자꾸만 수영강습을 부추긴다. 노트북을 켰다. 근처 수영장을 검색해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수강신청 기간은 이미 지났고 하순에야 신규 회원을 받는데 그마저도 빈자리가 나야 가능하다. 그래도 달력 앱을 열고 입력과 알림 설정을 해둔다. 자전거 타기에 처음 성공했을 때의 환희 같은 것일까. 바람을 가르며 달려 나갈 때처럼 물속에서 자유로워지는 기분을 나도 조만간 꼭 느낄 수 있기를.


그러려면? 우선 실망감에 맞서야 한다. 아마도 상당히 더딜 것이고 허우적댈 것이다. 민망하고 화끈거리는 순간도 자주 찾아올 것이다. 일평생 배운대도 자유형에서 끝날지 모른다. 줄의 꽁무니에서 헤맨다 한들 중도포기보다는 나으니까. 실망에 맞서는 무적의 방패는 기대를 확 낮추는 것. 그 정도 무기면 충분하다. 나는 산을 옮기려는 게 아니고 그저 물속에서 팔을 젓고 숨을 쉬려는 것뿐이니까. 음. 파. 음. 파.(2023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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