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공원에는 내 의자가 있다

다들 하나쯤 있잖아요?

by 박기복

낮잠에서 깼다. 일요일 4시 35분. 아침 일찍 나갔다 돌아와 점심을 거하게 차려먹고는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나 보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몸 저 안쪽에서 과도한 포만감이 느껴졌다. 벌떡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묶고는 신용카드와 에어팟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고 운동화를 신었다.


최근에 새로 개척한 산책로가 있다. 이 동네에 온 지 2년이 훌쩍 넘은 시점에야 발굴한 이 코스를 나는 (내 이름을 따) '박OO 로드'라 명명하였다. 간단히 말하면 가장 가까운 한강 공원에 다녀오는 코스인데 총 100분가량 소요된다. 친히 이름을 내어줄 만큼 나는 이 길이 꽤나 마음에 든다.


구분하자면 총 3부로 구성되는데 1부는 집을 나서서 한강 공원까지 가는 길로 왕복 6차선의 대로를 따라 이어진 인도 구간이다. 유난히 나무가 풍성하게 심어진 길이다. 강동구의 사업인지 모르겠지만 작년인가 인도 한쪽에 자리를 마련해 갖가지 풀들을 심어놓았는데 눈여겨보면 높고 낮은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어우러진 것이 전문가가 해놓은 꽃꽂이마냥 조화롭게 아름답다.


30분쯤 부지런히 걸어가면 한강 공원으로 향하는 나들목 앞에 도착한다. 작은 터널을 통과하면 한강 공원이다. 터널은 이질적인 두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와도 같아서 통과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든다. 이제부터가 2부의 시작이다. 비교적 위험요소가 없는 한강 공원에 들어서면 그제야 에어팟을 꺼내 음악을 듣는다.


로파이(Lo-fi)라는 음악 장르를 우연히 알게 됐다. '저음질을 뜻하는 음악 용어이자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음악 장르'라는 것이 네이버의 친절한 설명. 다듬어지지 않고 꾸밈이 없으면서 단조로운 멜로디가 마음을 차분히 해줘서 즐겨 듣고 있다.


자전거길과 나란히 난 보행로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키가 큰 나무들이 줄지어 이루는 초록벽, 보행로 옆의 이름 모를 들풀들을 구경하다 보면 마침내 강물이 눈에 들어온다. 강 건너 멀리 들어오는 풍경은 평범한 도시의 모습이지만 괜스레 더 평화롭다. 당장 갈 수 없는 '저기'라서 그런 걸까.


박OO 로드 산책의 클라이맥스는 '내 의자'이다. 강너머 풍경이 아름다운 딱 적당한 벤치를 발견하고는 나의 의자로 삼았다. 내 눈에 좋은 곳은 역시 남들 눈에도 좋은지라 늘 누군가가 먼저 와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조용히 합류하고 새삼 다시 음악을 고른다. 이 자리에서 꼭 듣는 음악은 <헤어질 결심>의 OST로 쓰인 '안개'다. 처음 이 자리에서 송창식과 정훈희가 함께 부른 버전의 안개를 들었는데 그 느낌이 너무 좋았어서 초등학생이 포도송이에 포도알 붙이듯 나는 이 자리에 오면 그 음악을 꼭 한 번은 듣는다. 말하자면 나만의 의식 같은 것.


3부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왔던 길과는 다른, 샛길처럼 난 2차선의 차도를 따라서 걷는데 인도가 워낙 좁아서 화단이 없다. 차도 양쪽으로 빼곡히 들어선 상점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면 멀리 내가 사는 아파트 머리가 보인다. 아 이제 집에 다 왔구나, 오늘도 많이 걸었네, 뿌듯하다 뭐 이런 생각들이 밀려든다. 한마디로 집이 보여 반갑다는 소리다.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디를 찾아 떠나지만 결국엔 잘 돌아오기 위해 떠났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긴 여행이나 짧은 산책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박OO 로드를 따라 10번도 넘게 산책을 다녀왔다. 100분이나 걸리니 자연스레 1만 보 이상 걷게 된다. 마냥 가뿐하지만은 않은 이 길을 향해 기꺼이 집을 나서는 이유가 뭘까. 왜 이 길이 좋을까. 그동안은 그저 내게 맞는 산책로를 발굴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걷는 것, 나무와 풀들, 강물이 흐르는 것을 보는 게 좋아서 그렇다고. 근데 그건 정답이 아니었다. 바로 오늘 오전 잠깐의 외출을 위해 차를 몰고 같은 길을 휙 지나면서 비로소 발견한 사실이 있는데 그건 박OO로드의 1부가 '완만한 내리막길'이라는 것이었다.


정작 걸을 때는 그 길이 전체적으로 내리막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어쩐지. 힘이 덜 드는 내리막길이라서 길가의 풀들도 예뻐 보이고 씽씽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소음도 개의치 않을 수 있었구나. 어차피 한강 공원 안에서는(2부) 시각적 만족감이 컸고 돌아오는 길은(3부) 오르막길이라 한들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의 약빨로 기꺼이 걸을 수 있었을 터다. 그러니까 요점은 산책로의 시작이 편한 내리막길이라는 게 굉장한 유인책으로 작용했다는 거다.


이 생각을 만지작거리다가 나는 다시 세 가지의 결론을 얻었다. 첫째, 습관을 만들고자 할 때는 의지고 나발이고 환경(조건) 설정부터 잘 해야한다는 것.(쉽고 편하면 큰 의지 없이도 저절로 하게 된다.) 둘째, 길을 걷고 있는 중에는 이 길이 완만한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 알아차리기 힘든 것처럼 멀리서 봐야, 통과하고 나서야 보이는 진짜 이유들이 있다는 것. (시간이 필요하고 거리가 필요하다.) 셋째, 때로는 그 이유가 거창하고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하다고 여겼던 물리적인 문제일 수 있고 그런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는 것.


그나저나 안심이다. 편안한 내리막길을 따라 나는 자주 떠날 것이고, 그곳에는 그림 같은 풍경을 품은 '내 의자'가 있으니까.(2023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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