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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복 Apr 30. 2024

우리 집엔 팅커벨이 산다

요정과 사는 맛

설거지를 미룰 때가 있다. 식사를 마친 즉시 하면, 물만밥의 남은 밥알을 떼내는 정도의 산뜻한 작업이건만, 굳이 시간을 들여 기어이 '오물'로 만들고 시큼한 냄새를 견디는 내 꼴이 한심하다. 그래서 가급적 미루지 않고 해치우려고 노력하긴 하는데.


오늘 아침에도 미뤄둔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 분량을 최소화하려고 식판까지 샀는데 한 끼만 먹어도 이것저것 한가득이다. 슬슬 시작해 볼까 하며 다가가던 참에 난데없이 날파리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올해의 첫 날파리다. 아뿔싸. 날파리의 계절이 왔구나. 바짝 긴장감이 든다.


여름에는 조금만 방심해도 날파리가 생긴다. 아니 '꼬인다'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하려나. 에어컨 때문에 창문도 열지 않는 뜨거운 여름에도 어김없이 나타나는 고향 모를 날파리는 청결함을 추구하는 주부의 자존심을 흠집 내는 반갑지 않은 존재다.


순식간에 도망가버린 날파리로 불편해진 마음을 안고, 거품을 잔뜩 내서 그릇을 닦는 사이 문득, 옛 기억이 떠오른다. 나 때는 초등학교(사실은 국민학교지만)에 '자연'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지금의 과학에 해당하는데 자연 시간에 얽힌 또렷한 기억 하나.


참외 껍질을 넣은 유리병을 두 개 준비한다. 하나는 그냥 두고, 다른 하나는 뚜껑을 닫아둔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당연하게도 뚜껑이 없는 병에만 날파리가 꼬인다. 과일 껍질에서 저절로 날파리가 생겨나지 않음을, 날파리는 외부에서 오는 것임을 증명하는 실험이다.


몇 학년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한낱 어린이에 불과한 나로서도 참 하나마나한 실험이라고, 어이없어했던 기억이 있다. 근데 오죽하면, 오죽하면 이걸 실험으로 구상했을까. 그 배경에는 사십 대 후반의 어른도 여전히 혀를 내두르는 날파리 출현의 기상천외함에 대한 궁금증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심란해진 마음을 달래듯 싱크볼의 수챗구멍까지 솔로 싹싹 문대본다. 조금만 방심해도 날파리는 금세 등장할 터다. 어쩌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언젠가 수업하는데 파리 한 마리가 교실에 들어와 요란하게 날아다닌 적이 있다. 과한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에게 건넸던 말. "얘들아, 인사해. 팅커벨이야."


한데 웃었던 그 오후, 아이들의 천진했던 표정이 생생하다. 오늘부터 당분간 우리 집에는 팅커벨이 산다. 더워지면 찾아오는 신비로운 요정. 여름 날파리여, 나는 그대에게 관대하리라. 하지만, 언제든, 수틀리면 전기 파리채로 타다닥. (20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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