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제목 아님. 일일드라마 제목 아님.
결혼이 늦은 편이다. 서른여섯에 마흔 살 남자를 만나 연애하고 서른일곱에 식을 올렸다. 남편은 잘 모를 테지만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파란만장한 소개팅과 맞선의 역사가 있었다. 저마다의 디테일을 품은 이야기의 큰 틀은 대동소이하다.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 하고 말았다는 그렇고 그런 스토리.
기대와 실망의 무한반복 같았던 만남 속에서 남편을 알아본 건 내 인생의 손꼽히는 행운들 중 하나다라고 쓰고 싶지만. 실은 인생은 타이밍이다. 누구라도 만나서 연애라도 해보리라는 다짐이 아니었던들 남편도 나의 과대망상의 허들을 넘지 못하고 진작 내 삶에서 퇴장했을 것이다.
소개팅과 관련한 의식의 흐름은 대략 이러하다. 만나기 전에는 자꾸 좋은 예감이 든다. 이번에 만나는 상대가 운명적인 상대일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이런 때일수록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하다. 크게 실망하면 일상생활에도 타격을 주니까. 연락을 주고받고 만날 시간과 장소를 확정하는 사이 상대가 보이는 말투, 태도 등은 집중하여 관찰할 대목이다. 드디어 디데이. 직접 내 눈으로 상대방의 겉모습(분위기 포함)을 확인하자마자 앞날이 점쳐진다. 외모가 맘에 안 들면 상쇄할만한 다른 장점을 찾는 데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면 좋을 텐데 그건 마치 매일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해서 성적을 올리는 것만큼 쉽지 않은 경지다. 사고는 급물살을 탄다. 마주 앉은 상대가 나의 인연이 아닌 확실한 증거를 순식간에 열개쯤 찾아낸다.
외모가 마음에 들어도 사고는 멈추지 않는다. 왜 아직까지 장가를 안 갔을까, 뭔가 단점이 있을 텐데라고 실눈을 뜨고 상대를 살핀다. 아무리 찾아봐도 문제가 없다? 하는 사람도 나의 인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내게 별 호감을 보이지 않고 시큰둥하기 때문이다. 이러니까 소개팅은 잘되려야 잘될 수가 없는 것이다.
설사 둘의 마음이 일단 맞아 몇 번의 만남을 이어간다 해도 우연히 눈에 띈 아주 작은, 작고도 하찮은, 그러나 얼마든지 결혼 생활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믿)는것을 포착하면 당장 관계를 접는다. 나는 소중하니까. 결혼은 인륜지대사고 대한민국의 이혼율은 매우 높으니까.
나의 삼십 대 전반기를 뒤덮은 소개팅에서 나는 대충 이런 식이었다. 마치 심사표를 손에 든 심사위원처럼. 끌리는 상대를 찾는다고 했지만 사실은 온갖 것들을 항목으로 삼아 점수를 매겼다. 문제는 그 심사위원이 심사를 할 수준과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도 현재의 남편은 뭐가 달랐는지, 뭐가 잘났는지에 관해 이야기가 이어질 거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남편은, 오늘 만나는 사람이 진짜 이상한 거 아니면 무조건 노력할 거라고, 연애의 단계까지는 기어코 진입할 거라고 굳은 결심을 하고 나간 자리에서 만난 사람이다. 물론 썩 괜찮은 첫인상이었지만 전처럼 예민하게 고운 눈을 가진 체로 걸렀다면 남의 남편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결혼 상대자를 고를 때 주목했던 것들이 정작 결혼생활에서는 그다지 중한 게 아니었다. 결혼 성사의 조건과 결혼 생활 유지의 조건이 일치하지 않는 게 결혼의 비극이라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무릎을 친 적이 있다.
호감과 끌림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물러지기 마련이고 반대로 없었다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외모도 그렇다. 보다 보면 익숙해진다. 이상형과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경제력은 중요하지만 얼마나 버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얼마만큼 돈을 쓰는가 하는 것이다. 돈 관리를 누가 할지도 마음이 맞아야 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기 때문에 경제력이 월등한 상대를 만나면 그만큼 어떤 식으로든 되갚아야 하는 사례를 주변에서 종종 보았다.
재미있는 사람,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는 기준도 시간과 비례한다. 둘만의 사연들이 쌓여나가면 단어 하나도 배꼽도둑이 될 수 있다. 말수가 적어서 걱정이라던 주선자의 안내가 무색하게 나는 지금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인 채로 수다쟁이와 살고 있다. (물론 특정 주제에 대해서만 장황하다. 가령 국내 및 사내 정치 이야기)
싸워도 잘 화해할 수 있는 사람(극단으로 치닫거나 막말을 하는 사람은 상당히 곤란), 50% 이상의 가사노동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내 몸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마음 갈 리 만무), 공감 능력과 측은지심을 탑재한 사람, 공간을 무난히 공유할 수 있는 사람(너무 깔끔하거나 너무 더럽거나 등 '너무'를 많이 가진 사람은 곤란)이 결혼 상대자로 훌륭하다. 물론 순전히 내 경험에 기준한 서술이다.
몇 년 전 인상적으로 읽었던 <평균의 종말>은 평균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허상인가를 낱낱이 파헤친다. 평균의 인간이란 없다. 우리는 개개인으로 존재한다. 내가 어떤 면이 충족되어야 행복한 사람인지를 충분히 살피지 않고 상대를 고른다면 필패다. 주말마다 나돌아 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집돌이와 결혼하거나, 미니멀리스트와 결혼한 맥시멀 리스트는 잦은 충돌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딱 맞는 사람은 없다는 거다. 벤다이어그램의 겹치는 부분에 정치색, 인생관, 가치관 등이 포함되어 있다면 나머지는 각자의 영역으로 두고 혼자 즐기면 된다. 긴 책상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는 부부라는 로망을 실현하고자 180센티 길이의 책상을 신혼살림으로 구입했지만 지금 나는 바퀴 달린 의자를 이쪽저쪽으로 이동시키며 책상을 혼자 쓰고 있다. 남편은 독서엔 영 취미가 없고 그덕에 우리집 서재는 온전히 내 방이다.
대신에 내가 읽은 책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떠들면 잘 들어준다. 적절한 질문을 하고 자기 생각도 밝힌다. 그러니까 우리 부부는 책모임 회원들이 나눌법한 대화를 하는 것이다. 물론 시간은 짧다. 남편은 소파에 기댄 기본자세로 스마트폰 게임을 즐겨야 하기에 딱 미움받지 않을 정도의 관심으로 평화를 유지한다.
오늘 퇴근 후 갑자기 열이 올랐다. 인근 병원에 가서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음성이었다. 그러나 열감 때문인지 모기에 물린 것처럼 눈두덩이가 작게 부어올랐다. 남편은 나를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안타까워했다. 그런 남편을 보며 나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가 외적 변화 말고 아내의 내면에 관심을 더 많이 주었으면 하는 게 2022년 버전 최대 민원사항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내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 여기 와서 일주일에 한편씩 올라오는 글을 읽으면 알 텐데. 가족이 출연한 연극을 못 보는 어색함 같은 것인지 남편은 나리노리 작가에겐 관심이 없고 심지어 몇 주간 나를 도리도리 작가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툴툴거리고는 있지만 남편의 방목 덕에 나는 일기를 여기저기 써서 아무 데나 둘 수 있고,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글들을 내 방 도처에 붙여둘 수 있으니 그는 내 글쓰기를 다른 방식으로 조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 벤다이어그램 저편의 영역을 존중하기로 하자. 다만 '이래도 내 글을 서둘러 안 읽을 텐가?'하는 작은 오기를 담아 이 글의 제목을 다소 낯뜨겁게 고쳐 적을 따름이다.(2022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