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동안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마음이 소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창문을 열고 바라보는 맑은 하늘과, 봄바람, 따사로운 햇살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대가 과연 과거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지 잠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평화로운 여유가 있다.
삶은 부조리의 연속이라고 한다.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죽음으로 한걸음 더 다가서는 것, 죽음과 삶의 공존이라는 이 노선을 벗어나는 인간은(신앙을 제외하면) 어디에도 실존하지 않는다. 또한 ‘시간’이라는 흐름 안에서 바라보는 현재의 ‘불확실성’은 <이것도 또한 지나가리>라는 사유의 관점에서는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나날 들일지도 모른다.
바라보고자 하는 실상을 마음의 동요 없이 객관적으로 관찰하려면, <나의 선택>이 이끌어가는 <감정>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 우려, 걱정, 불안은 현상을 확대해 보려는 방향성과 함께 불확실성 안에 스며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더욱 공고히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뉴스를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덧붙여 읽고 실상과 다른 결론을 도출해 버리곤 한다. 자꾸 그런 함정에 빠져 드는 것 같아 요즘엔 뉴스를 많이 보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이민자로서 살아가는 개인이 지닌 힘이란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스웨덴 정부의 정책결정이 <나>를 지켜온 삶의 가치관에 위배되더라도 그것 때문에 <나>라는 개인이 힘든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 되더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부조리한 삶의 특성처럼 무언가 하나를 포기하니, 포기와 함께 찾아온 것들이 생겨났다. 아이와 함께 화분에 씨앗을 심고,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고 목화씨앗이 싹트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열 살 된 딸아이와 구부려 앉아 씨앗 앞에 앉아 듣는 클래식 음악이 참 잔잔하다. 뉴스 보는 시간을 줄여 아이에게 줄 수제 쿠키를 만들어 보고, 집안을 정리하고, 베를린 필하모닉, 오페라의 유령, 안드레아 보첼리와 같은 세계적 공연들을 무료로 보기도 한다.
러시아의 혁명가였던 트로츠키가 암살당하기 전, 유언장에 썼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글귀가 로베르토 베니니의 걸작 ‘인생은 아름다워’의 모티브가 되었듯이, 긍정의 힘, 그리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의 결정체가 인간이어서 우리의 미래는 아직도 밝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절망 속에서 창작의 혼을 발휘하였던 예술가들의 작품들은 절망이라는 슬픔이 있어 절제되고 깊이감 있는 감동을 주게 된다. 어둠이 있어 빛이 더욱 빛나 보이는 원리와 같다.
부정과 긍정, 절망과 희망, 어둠과 빛 중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
지치고 힘들 때 자신만의 퀘렌시아를 찾아가라던 류시화 시인의 글이 생각난다. 자아 회복의 장소, 나를 다시 찾을 수 있는 힘을 얻는 퀘렌시아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 피난처에서 지치고 상처 입은 자아가 아물고 회복되기를 바래어 본다. 힘든 마음도, 비난이 넘쳐나는 생각들도, 투우사와 싸우던 지친 소가 퀘렌시아에서 자신만의 쉼을 얻어 다시 일어서듯이 우리도 그럴 수 있기를 희망한다. 살아내야 하는 인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방황했지만 사색할 수 있어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