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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드저널 Sep 09. 2016

아빠가 된 소년의 놀이

아이와 놀아달라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축구공을 들고 나갔건만, 정작 놀이의 방해꾼은 다름 아닌 아이다. 규칙이 없거나 규칙이 존중받지 못하는 아이와의 놀이에 임하는 철학자 아빠의 항변.

 

written by Youngmin Kwon / illustrated by Eunhyun Bak 



규칙없는 놀이는 재미없다 

네 명이서 화투를 쳐도 세 사람은 패를 돌려 게임을 하고, 남은 한 사람은 광을 파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많이 잃은 사람에게 개평을 나눠줘야 한다. 우리는 결코 제멋대로 놀지 않는다. 

몰입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칙이 있어야 한다. 모든 놀이는 일정한 구성으로 이루어지며, 그에 따른 규칙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놀이는 객관적이다. 규칙이 없는 놀이는 지속하기 힘들다. 설령 제멋대로 노는 놀이가 있다면 거기에도 ‘제멋대로 해야 한다’는 최소한의 규칙이 있다. 

SNS를 하는 것도 일종의 놀이다. 누군가 사진을 올리면 ‘좋아요’ 클릭해주기, 이 게임의 놀이 규칙이다.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르는 것에도 규칙이 있다. ‘2절까지 욕심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노래에 호응해준다’ 같은 약속이 있다. 누군가가 마이크를 독점한다면 그 사람은 노래방 놀이의 방해꾼이다. 규칙 없는 놀이, 규칙이 있더라도 규칙이 존중받지 못하는 놀이라면 재미가 없다.



어떻게 놀아달라는 말인가 

내게 방해꾼, 놀이를 재미없게 만드는 이가 있다면 바로 우리 아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와 놀아주는 일은 재미가 없다. 아이와의 놀이가 아빠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 믿지만, 의미가 있다고 해서 다 재밌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아이는 세 살 때 장난감 자동차 두 개를 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아빠, 자동차 놀이 하자”고 졸라댔다. 그것은 사실 어렵지도 않고, 전혀 힘들지도 않았다. 그저 비스듬히 누운 채로 자동차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가끔 아이의 자동차와 충돌시키고, 고장이 났다고 하면 수리하는 시늉을 하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가 ‘두 대의 자동차’를 들고 내게 오는 것이 항상 두려웠다. 왜냐하면 자동차 놀이에는 규칙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의 자동차 놀이에 어떤 규칙이 있기는 한 것일까? 도대체 어떤 규칙이 있는 것일까? 

아이와 놀아주라는 엄마들의 토로에 “도대체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아빠들의 말이 단지 핑계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놀이에는 놀이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존중하는 놀이 규칙이 있어야 하는데, 세 살 아이에게는 그것이 없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가 자동차 놀이의 규칙을 아빠에게 알려줄 수도, 아빠가 알려주는 규칙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나는 이 자동차 놀이에 좀처럼 몰입이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와 놀아주는 일은 재미가 없다.
아이와의 놀이가 아빠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 믿지만,
의미가 있다고 해서 다 재밌는 것은 아니다. 


아이와 싸우는 이유

여섯 살이 된 아이는 이제 놀이 규칙을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었다. 세 살 아이와 노는 것보다는 낫지만 놀이의 끝은 거의 파국이다. 아이가 놀이 규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며칠 전, 아이와 승부차기를 했다. 내가 열 번을 차서 일곱 골을 넣었고, 이어서 아이가 열 번을 차기로 했다. 세 번 연속으로 아빠가 축구공을 막자 아이는 급기야 울기 시작했다. “함께 놀다 보면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며 달래봤지만 아이는 막무가내로 놀이 규칙을 거부해버린다. 아빠가 이기면 견디기 힘들어하고, 그렇다고 일부러 져주면 시시해한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아이는 흡사 노래방 마이크를 잡고서 놓지 않는 부장님 같다. 비위를 맞춰주고, 적당히 져주기도 하고, 게임에서 지고 실망하면 달래줘야 한다. 그럴 때면 아내는 “좀 놀아주라 했더니 왜 똑같이 애처럼 싸우냐”고 타박하지만, 나는 단지 아이와 노는 것에 집중했을 뿐이다. 게임에 몰입해 이겨버리고 말았는데, 우는 아이를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세 살 아이와의 놀이에는 규칙이 없었고, 여섯 살 된 아이는 규칙이 있어도 지키지 않는다. 나는 그냥 아이와 엄마의 놀이에 광이나 팔고 개평이나 뜯고 싶다.



제대로 된 놀이판을 만드는 일 

예전에 나는 아이와의 놀이가 이토록 지루하고 힘든 것은 아이와 ‘놀아주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자동차 놀이든 승부차기든 내가 스스로 즐긴다면 노는 것이 힘들 리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승부차기를 할 때처럼 아빠가 ‘놀기’에 집중하면 아이는 즐겁지 않다. 어쩌면 아이와 놀기 힘들었던 진짜 이유는 내가 ‘정말 잘 노는 아빠’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잘 노는 사람은 놀이 규칙을 따라 놀지만, 정말 잘 노는 사람은 놀이 규칙을 새롭게 만들 수 있고 놀이에 참여하는 모두를 세심하게 배려한다. 

그러니까 나는 놀 줄만 알았지 제대로 된 놀이판을 만드는 것에는 서툴렀다. 놀이판을 만드는 것은 정말 잘 노는 아빠만이 할 수 있다. 그런 아빠는 규칙이 없어 보이는 세 살 아이의 놀이를 조심스레 따라가면서도 그속에서 나름대로의 규칙을 발견하고, 아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면서 더 재밌게 규칙을 바꿔나갈 것이다. 여섯 살 아이와의 축구에서도 규칙을 고집하는 대신 아이에게 공평할 수 있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놀이보다 일을 좋아하는 아빠에게

놀이는 규칙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놀이가 된다. 만약 놀이 규칙을 바꿀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 놀이보다 일에 가까울 것이다. 

화투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화투의 규칙을 바꿀 수 없다면, 화투는 놀이가 아니라 도박이 된다. 축구 선수는 축구의 경기 규칙을 바꾸려 하지 않아야 직업적인 선수일 수 있다. 하지만 ‘놀이’는 일과 다르다. 제멋대로 하는 것을 놀이라고 할 수 없지만, 제멋대로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도 놀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논다는 것’은 놀이 규칙을 만들고, 모두를 위해 규칙을 바꾸고, 일단 정한 규칙은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잘 노는 사람은 놀이의 이러한 이중성, ‘규칙 준수의 요구’와 ‘규칙 변경의 가능성’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나를 포함해 많은 아빠가 일이 놀이가 되었다. 사실 어떤 일은 놀이와 비슷한 점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일은 반쪽짜리 놀이일 수밖에 없다. 일은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규칙을 변경한다. 

하지만 놀이는 효율성이나 성과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놀이의 가치는 꼭 해야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하는 것에서 나온다. 동네 밴드에서 노래를 하고, 드론을 날리고, 조기 축구회에 나가고, 지역 축구팀 서포터가 되고, 아이들을 위해 동화를 쓰고, 동화를 읽어주는 팟캐스트를 만들고, 아이들이 뛰어놀 놀이터를 만들고, 아예 자신의 집을 아이들의 실내 놀이터로 개방하는 아빠들. 이들은 꼭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을 하고 있다. 거기에 다른 목적은 없으며, 오직 재미와 해방감만이 있을 뿐이다.



놀이는 규칙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놀이가 된다. 만약 놀이 규칙을 바꿀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 놀이보다 일에 가까울 것이다. 


놀이가 선물하는 삶의 유연성 

영화 <레고무비>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레고 세상을 ‘접착제’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려는 음모에 대한 주인공의 저항을 담고 있다. 영화는 애니메이션으로 진행되다 가끔 실사 촬영분이 나오는데 레고 마니아인 아빠와 그의 아들이 등장한다. 아빠와 아들은 모두 레고를 사랑하지만 레고로 노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 아빠는 설명서대로 레고를 만들어 접착제로 고정해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도록 하지만, 아들은 아빠가 조립해둔 레고를 만지고 해체하고 다른 형태를 만들고 싶어 한다. 아빠는 자신이 만든 레고 세상에 아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아빠는 접착제 세계, 움직이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접착제 세계에서 살며, 놀이도 움직일 수 없는 일처럼 대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아이가 해체하고 부수고 새로 만드는 세계를 접착제 세계에서 사는 아빠가 지켜줄 수 있을까? 잘 노는 아빠라야 ‘잘 노는 아이’로 키울 수 있다. 자기가 따르고 지킬 규칙을 스스로 만드는 것, 세계는 ‘접착제’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내가 자유롭게 만들고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 그 모든 것을 아이는 놀이를 통해 배우는 것이다. 

아이의 성장은 아빠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자동차, 축구공, 레고를 들고 놀아달라 조르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의 자리는 친구가, 게임이 대체할 것이다. 바로 그때 아빠가 그보다 더 매력적인 놀이를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아이에게 제대로 노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면 어떨까? 이것이 아빠가 진짜 놀이를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이유가 아닐까.



이 글을 쓴 권영민은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철학을 공부하는 공동체인 ‘철학본색’을 운영하며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숙원하던 음악 공부를 위해 유학길에 오른 아내를 대신해 아들 선재를 키워낸 값진 경험을 육아일기로 기록했다. 그 기록을 엮어 <철학자 아빠의 인문육아>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현재 서양미술사를 주제로 한 새 책의 출간과 함께 둘째 아이의 출산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 아이와 제대로 노는 법을 아는 아버지들의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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