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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드저널 Aug 30. 2017

아빠의 공간은 어디에

남자에겐 수시로 ‘동굴’이 필요하다.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있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오늘도 묻는다. ‘내 영혼을 누일 곳은 어디입니까?’


 강승민 일러스트 정지인 




최근 집을 이사했다. 이사를 준비하면서 아내는 내게 이사와 관련한 특별 지시 사항이 하나 있다고 했다.

“집에 안 쓰는 물건이 너무 많아. 나도 내 물건들 정리할 테니, 당신도 이번 기회에 안 쓰는 물건들을 싹 정리해. 작은 집에서 쾌적하게 살려면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아내는 남편이라는 작자가 혹시나 지시 사항을 따르지 않을 걸 우려했는지, 어느 날은 문자메시지로 드라마 한 편을 꼭 보라며 해당 링크까지 걸어서 보내왔다. 타이틀은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 일본 드라마인데, 주 내용은 사는 데 필요한 최소의 물건을 제외하고 많은 것을 버리는 ‘미니멀 라이프’를 시작하는 삶을 담았다.


안 쓰는 물건을 버려 공간을 넓게 사용하자는 말에는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물건마저 버리면서 살아갈 생각은 없다. 집에 내 공간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 내 물건 중 일부를 소유하겠다는 것이니까. '우리 집에 아무것도 없을 수는 있으나, 내 것이 없을 수는 없다'는 나름 수상하고 이기적인 논리를 펴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쩐다? 아내가 정리한 ‘남편 짐 정리 리스트’ 에는 상당수 내가 좋아하는 물건이 포함됐다. 다음은 내가 처분해야 할 물건의 리스트다.


초콜릿 색상의 칙칙한 가죽 소파

신혼집을 마련하면서 내가 고른 소파였다. 아내는 색상이 우중충하다고 환한 베이지 색상을 권했으나, 무릇 소파라고 하면 짙은 색상으로만 인지하던 남자가 고른 물건이었다. 그렇게 집에 들여온 소파는 게으른 나의 옷가지들이 쌓이는 공간이 됐고, 아내는 소파가 집을 지저분하게 만든다며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차였다. 당연히 소파는 이사 전 정리 물건 1호가 되었다.


총각 시절부터 챙겨 다닌 다수의 책들

어느 잡지 사진에서 자랑하듯 넓은 서재 공간을 꽉 채울 만큼의 책들은 아니다. 이케아 IKEA에서 구입한 3단 책장 두 개를 조금 넘을 분량이다. 결혼하고 첫 번째 이사를 하면서 한 번 정리하고 남은 책들인데,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다시 한번 책 정리를 권유(혹은 강요?)받는 처지가 되었다. 사실 책을 정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삶의 어떤 지점을 거쳐온 손때 묻은 책들이라는 생각이 들면 더욱그렇다.그럼에도 집에 들어오면 책 한 권 들춘 적 없이 먼지만 쌓여가고 있으니, “이건 정말 필요한 책들”이라고 항변할 여지도 안 되었다. 이사를 하면 책장이 사라진 공간은 이제 두 살이 돼가는 딸의 옷장이 차지할 것이다.


오디오와 추억의 비디오 등등

아마도 오디오와 그 부속품은 신세대와 구세대를 구분하는 명확한 물건일지 모른다. 요즘처럼 모바일 블루투스로 음악을 듣는 미니멀 혹은 노매드 시대에 집의 한 공간을 크게 차지하는 오디오 시스템이라니. 이 스피커로 말할 것 같으면, 또는 이 앰프가 1950년대 빈티지 라인이고 어떻고 해도, 오디오는 아재들의 구시대적 유물일 수밖에 없다. 그 오디오 옆에는 나의 총각 생활을 함께한 추억의 비디오(DVD)가 쌓여 있다. 그중에서 〈미래소년 코난〉, 〈용쟁호투 : 이소룡〉, 〈웨스트윙〉, 〈카우보이 비밥〉,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등은 내 시절의 걸작으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지난번 이사를 하면서 정리할까 했으나 '그래도 이건 내 추억이라 버리지 못하겠다'며 우겨서 챙겨온 것들이다. 시간이 되면 벽걸이 선반을 만들어 수납하려 했으나, 그걸 못 해서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됐다.


집에 나만의 공간이 있어서 이런 물건들을 놓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이사가는 집에 나를 위한 공간은 없다. 사실 나만의 공간을 갖기 위해서는 경제적 형편이 허락해야 하고, 더불어 함께 사는 타인의 취향을 염두에 둬야 한다.

 나의 아끼는 물건들을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잠시 저 물건들이 모두 놓인 공간을 상상해본다. 7080 골동품을 파는 황학동의 한 가게 같은 추억의 공간이 비슷할까. 

나의 물건들이 놓일 곳은 사각형의 반듯한 공간이 아니라 천장이 세모꼴인 다락방 공간이 어울리지 싶다. 빛이 제대로 들어올까 말까 하는 작은 창이 달렸다면 더 애정이 갈 것이고, 그 공간에는 제법 퀴퀴한 수컷의 냄새가 묻어나도 좋을 것 같다. 방문에는 ‘수컷 외 출입 제한’이란 문패를 걸어두면 어떨까. 몇 줄 읽다 만 책들이 이리저리 나뒹구는 그곳에서 나는 인테리어에는 도통 감각이 없는 남자들이나 선호하는 짙은 색 소파에 두 다리를 뻗고 누워 빈티지 음색을 지닌 라디오를 켤 것이다.


상상은 여기까지,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책은 절반 이상을 정리해 집 근처 중고책 서점에 팔았다. 그렇게 생긴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유니클로에서 딸의 여름옷을 한 벌 사주었다. 애장품 비디오들은 차마 버리지 못했다. 누가 살 사람도 없을뿐더러, 그 표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추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비디오들은 서랍장 구석에 처박힌 신세지만, 오며 가며 그 이름들을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다.


그렇다면 소파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다행히 소파는 이삿짐 차에 실렸다. 아내는 이 기회에 어느 북유럽풍 디자인 책에 실릴 법한 2~3인용의 밝고 심플한 소파를 구입하자고 제안했으나, '그래도 소파라는 이름을 가진 물건이면 두 다리 쭉 뻗고 누울 수 있는 사이즈의 가죽 소파가 진리'라는 나의 우격다짐식 실용주의(?) 논리에 설득(?)당해주었다. 이사한 집에서는 더 이상 소파 위에 내 옷들을 편하게 쌓아두진 못한다. 그래도 잠시나마 편하게 누워서 게으름을 피우며 뒤척이곤 한다.


자꾸만 수컷의 공간이 사라지는 시대지만, 그래도 서운하지는 않다. 혼자를 위한 그럴듯한 공간이 없다고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맥아더 장군의 유명한 이 말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노병(남자의 물건 혹은 공간)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Conversations of Cave-less Males

자가 동굴 없는 수컷들의 웃픈 대화


주변의 수컷들은 어찌 살고 있을까? 내 주변 여섯 명의 수컷에게 문의한 결과, 단 한 명도 자기 공간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연령대는 모두 3040, 직군은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는 샐러리맨 2, 문화 예술가 2, 크게 돈 걱정 없는 자영업자 1, 의사 1이다. 굳이 상세 프로필을 소개하는 이유는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이들이 한편으로 대한민국 수컷들의 평균치는 될 것이란 주장을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내 주변의 평균치에서 나는 집에 자기 공간을 가진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다음은 그들과의 대화 목록이다.


— 대화 01
나: 집에 너만의 공간이 있냐?
샐러리맨 1: 형, 나 애가 셋이야.
나: ....(한마디가 모든 것을 말해줌)
* 그는 오토바이 마니아이며 캠핑 및 낚시광이다. 그 취미 탓에 관련한 물건들을 쌓아둘 공간 하나쯤 있을까 했다. 그의 물건들은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둔 일제 오토바이의 사이드 박스와 아웃도어 라이프를 위해 중고로 구입한 SUV 차량의 짐칸에 다 실려 있다.


— 대화 02
나: 집에 네 것이 없으면 너는 어디 있냐?(제법 철학적 질문)
작가 1: ㅋㅋ, 먹고살기 바빠서. 그래도 어딘가에 있겠죠.
* 그는 네이버 포스트에서 자기 좋아하는 일본 여행기를 올리고 있다. 돈은 안 되지만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해서 괜찮단다. 그래, 집에 네 공간 없으면 어떠냐, 지금은 네이버 포스트 〈트래블룸〉 이 훌륭한 너의 공간인데....


— 대화 03
나: 넌 돈도 잘 버는데 집에 너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도 되잖아?
의사 1: 원래 버는 사람, 쓰는 사람 따로 있는 게 돈이야. 대한민국 남자 90% 이상이 그렇게 살아.
* 그는 아내와 두 딸이 허락한다면, 철저하게 방음이 된 공간을 마련해서 게임과 영화를 실컷 즐기고 싶다고 했다.


— 대화 04
나: 집에 너를 위한 공간이 있으면 어떻게 꾸밀 건데?
샐러리맨 1+자영업자 1: 그냥 빈 공간. TV나 책 등 뭐라도 두면 또 숙제처럼 봐야 할 것 같아서 아무것도 없는 공간. 마치 명상이나 요가하는 방 같은 그런 곳.
* 복잡하고 피로한 현대사회이기에 그 반대의 선상에서 ‘미니멀 라이프’가 유행하는 것일까. 둘은 내가 아는 그들의 취향과 달리 아무것도 없는 ‘심플한 방’을 원했다.


— 대화 05
나: 형, 페르시안고양이는 잘 있지? 집에 고양이를 위한 공간은 있을 텐데, 혹시 형을 위한 공간은 있어?
예술가1: 고양이가 셋으로 늘었어. 나 잠잘 자리도 없다. 세 마리가 침대에 자리를 차지하면 거기 남는 공간이 내 잠자리야.
* 그는 최근 서울의 백련산 자락으로 이사했다. 동네에서 오르막길을 올라 마지막 빌라가 이사한 집이다. 예전에는 아내가 그런 위치에 있는 집을 싫어했으나, 결국 자연의 품에 거처를 구했다. 거처가 곧 그의 공간이 된 셈이다.



글을 쓴 강승민

잡지와 출판 에디터로 인생 전반전을 살았다. 후반전에는 뭘 해야 하나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중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살고 싶으나, 감당 못 할 팔자라는 것쯤은 안다. 커가는 딸이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에서 살아가기를... 지금은 그걸로 됐다.



* 자가 동굴이 그리운 아버지들을 위한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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