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판매대에 오른 골드키위를 보면 괜히 혀가 아린 것 같아 침을 삼킨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혹은 무의식적으로 매대 앞으로 걸어가 두 팩을 척 집어 계산대로 향한다. 같이 먹을 사람이 있지도 않은데. 집에 돌아와 잘 익은 말랑한 키위를 두어 개 골라 껍질을 얇게 벗겨내고 먹기 좋게 슬라이스 한다. 그렇게 하루에 두 번 정도 먹다 보면 다음날 여지없이 혀끝이 아린다.
딸기나 방울토마토는 한 팩을 살 때도 가격이나 양을 보고 고민하면서도, 더 비싼 골드키위는 두 팩, 하루에 서너 개가 기본단위 었다. 그 결과로 얻은 아린 혓바닥을 스읍하면 살짝 맴도는 피맛은 그 익숙한 맛의 기억을 불렀다.
내가 왜 그렇게 골드키위를 먹게 되었는지.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고 아빠와 지내고 있던 시기에 둘째 고모가 출산을 했다. 아빠는 둘째 아들로 위로 큰고모가 한 명, 아래로 둘째 셋째 고모가 있었다. 아빠는 일하러 나가는 자신을 대신해 막내 고모를 우리 집에서 지내게 하면서 나를 돌보게 했는데, 이때 둘째 고모가 출산 후 아이를 데리고 와 우리 집에서 산후조리를 했다. 친할머니며 고모들, 아기까지 15평 남짓되는 우리 집을 그들은 산후조리원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덕분에 한 여름에도 보일러를 켜는 일과 산모와 갓난아기에게서 얼마나 많은 빨래가 나오는지 잘 알게 되었다. 아빠는 점점 집에 들어오는 날이 줄어들고 있었다.
골드키위를 처음 본 건 그때였다. 둘째 고모의 아이가 조금씩 이유식을 먹기 시작하면서 할머니랑 고모는 다양한 과일을 사 오곤 했는데 그중에 골드키위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지금으로 치자면 신비 복숭아나 애플망고같이 한 팩에 값이 꽤 나가는 귀한 과일이었다. 이유식을 만들 때 옆에 알짱거려 한 번 맛본 골드키위는 키위 같지 않게 달달해서 맛있었다.
어느 날 하교 후 남아있던 골드키위를 발견하고는 신나게 몇 개를 까먹었다. 우리 집 냉장고에 있었으니까. ‘먹어도 되나’ 하는 생각은 스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내 돌아온 할머니와 고모에게 나는 눈물이 펑펑 날 정도로 혼났다. 내가 열한, 두 살 즈음이었다. ‘왜 네가 그걸 먹냐’는 내용인데 정확히 무슨 말을 들었는지 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표정은 기억한다. 적대감과 짜증, 분노에 가까운 얼굴이 금방이라도 나를 짓눌러 없앨 수 있을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가슴이 아린 것, 서럽게 슬픈 마음이 뭔지 그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이곳은 우리 집인데, 더 이상 그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 얹혀있는 곳 같았다. 언제든 그들에게 집을 뺏기고 쫓겨날 것 같았다. 아빠는 집에 들어오는 날이 더 적어졌고 연락도 거의 없었다.
일련의 일들로 내가 외갓집에 다녀온 후, 외할머니는 이모 삼촌들이 있는 외갓집으로 나를 데려와 키우셨다. 나는 이 시기에 정말 많이 혼나고 또 보듬어지며 자랐는데, 이때 혼나는 일은 그때처럼 공포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골드키위를 아주 아주 잔뜩 먹었다. 지나가는 말로 저걸 못 먹게 했다고 말했던 것 같다. 평소에는 살가운 편이 아니시지만 손녀 먹는 건 끔찍하게 챙기셨던 할아버지는(아기 때 돌봐주시는 동안 이유식을 매끼 새로 해서 주셨단다) 원이 풀릴 때까지 먹어보라고 내가 질려할 때까지 골드키위를 사다 주셨다. 그때 나는 키위를 정말 많이 먹으면 혀가 아리고 피가 난다는 걸 경험해서 알았다. 그리고 한 동안 골드키위는 찾지 않았다.
잊고 살았던 골드키위의 역사(?)를 떠올려 생각한 날에는 조금 웃고 울면서 키위를 먹었다. 글을 쓰는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전화해서 이야기라도 할 텐데. 이제 골드키위는 욕심내서 먹지도 않고 그렇게 먹고 싶지도 않은걸 보니 그때 원이 다 풀린 것 같다고. 친구들에게 ‘나 예전에 혓바닥에 피날 때까지 키위 먹어봤어~’ 하면서 농담처럼 이야기도 한다고.
감사하다고, 감사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