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단 맛이 나는 슈거 프리 케이크와 상하이의 첫날밤
상하이로 향하는 남방항공 비행기 안에서 나는 미리 타국의 색감과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좌석마다 비치되어 있던 매거진을 찬찬히 넘겨 보며, 같은 동북아시아임에도 내가 살아온 나라와 처음 방문한 타국이 각자 오랜 시간을 거쳐 쌓아온, 각각 추구하고자 하는 느낌이 이렇게 서로 미묘하고도 크게 다르구나를 느끼며 여행자가 느끼는 그 설렘이 점점 고조되어 갔다.
25년 2월 20일, 상하이 시간 오후 1시 35분
상하이 푸동 공항에 도착
드디어 도착했다. 2시간 30분이면 올 수 있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의 도시였다. 무사히 상하이 입국 심사 절차를 마치고 시내로 나가기 전 공항 내 패스트푸드점에 들렀다. 중국은 거의 모든 결제 시스템이 알리페이와 위챗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나의 알리페이 전자 지갑이 제대로 작동되는지 너무 궁금했다. 만약 그렇지 않게 된다면 주머니 가벼운 이 여행객이 얼마나 2박 3일이 고달프겠는가. 그리고 긴장이 풀렸던 탓인지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셔 목이 타들어갔던지라 시원한 탄산음료가 절실했다.
다행히 알리페이에 등록해둔 해외 결제 가능한 체크카드는 잘 작동되었다. 큐알코드와 바코드 스캔만 하면 끝이었다. 교통카드도 따로 충전할 필요 없이 알리 페이로 모두 해결이 가능하니 중국은 정말 한국 이상으로 모든 것이 시스템화되어 있구나를 실감했다.
내가 정말 상하이에 왔구나.라고 느꼈던 순간은 지하철에서 내려 호텔로 가는 시내를 걷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먼저 상하이 도시에 있는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이나 경기도 시내에 있는 나무는 대부분 몸통이 두껍지 않고 키가 큰 은행나무라고 알고 있다.
반면에 상하이 시내에서 본 대부분의 나무는 좀 더 키가 낮고 가지들이 넓은 폭으로 위로 뻗어있었다. 마치 사슴의 뿔 같았다. 나중에 검색을 해보니 플라타너스 나무들이었다. 한국에서 거의 보지 못한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나무들이라고 인지했던 이유는, 한국 도심에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들은 대부분 규정 때문에 가지치기를 해 그 형태가 온전하지 않다고 한다. 반면, 상하이의 플라타너스는 가지치기를 하지 않고 그 형태가 온전히 보존되어 자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상하이의 아름다운 거리를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하이 도심 속 플라타너스의 '온전한 사슴뿔 가지들'은 이질적이고 이국적이었으며 난 그 느낌이 좋았다.
자동차보다 전기자전거와 스쿠터, 오토바이가 차도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는 것. 80-90년대에 멈춘 것 같은 빈티지한 외벽의 색감과 디자인의 아파트 건물들-낡고 허물어져 재개발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기보다는, '단단하게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상하이에 뿌리박힌 느낌'.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있어왔고 있을 것이며 있어야 되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상하이 시민들의 주거지역이라는 느낌. 사이사이 보이는 세리프[Serif]의 두께감 있는 중국 한자들로 적힌 간판들. 그리고 그런 채도 낮은 공기와 분위기와 대비되는 도시의 요소들.
상하이는 생각보다 동적이지 않고 정적이고 차분했으며 기분 좋은 차가움과 쓸쓸함마저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이국적이고 화려했다.
기분 좋은 차가움과 쓸쓸함, 그리고 화려함이 있는 도시. 난 이런 느낌을 주는 것들을 오랫동안 좋아했다.
사람은 원체 자신과 닮은 것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살면서 자신과 닮은 것들을 쉽게, 흔하게 발견하기는 어려워 나를 닮은 것들에 애착을 느끼고 의미를 부여하고 마음을 준다.
상하이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존재들이 품어온, 나와 닮은 것들이 있는 도시였다.
때론 겉모습은 밝아 보이지만 그 내면의 본질은 쓸쓸하고 외롭고 어둡다. 때문에 어둡고 소외된 것들에 특별함을 느낀다. 말하지 못한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한 것들이 좋다. 해리 포터보다는 판의 미로 같은 판타지를 사랑한다.
호아킨 피닉스가 표현한 조커를 좋아한다. 헤드윅의 Origin of love를 가장 좋아하는 곡인 이유도, 사랑은 고통이라고 부르는, 외로운 인류의 애정에 대해 노래하는 드랙퀸의 화려함이-'가슴 박힌 사랑의 아픔'이라 좋다. 홍콩 영화를 좋아했던 이유도 장국영과 양조위의 우수에 찬, 짙은 우울감이 눈빛에서 느껴지는 감정선을 좋아해서다. 장만옥의 화려한 이목구비에서 느껴지는 가슴 아픈 사랑을 참아내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패왕별희의 우희를 연기한 장국영의 내적 고통과 외로움이, 그가 화려하게 치장하고 연기하는 경극의 슬픈 붉은색이 좋았다.
나는 따사로운 햇살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지는 밝은 도시의 색감을 좋아하지 않는다. 소소하고 귀여우며 서정적인 도시의 색감 또한 좋아하지 않는다.
어딘가 쓸쓸함이 느껴지는 낮은 채도 위에 얹어진 순수한 코발트블루의 색감과 깊고 검붉지만 고 채도의 빨간 장미가 연상되는 색감을 좋아한다. 그리고 상하이는 그런 색감을 갖고 있는 도시였다.
중국은 붉은 것에 길한 의미를 부여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온 도시가 화려하고 붉게 치장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물론 어두운 밤의 상하이는 화려한 도시 건물로 눈이 부시지만 달이 뜨지 않은 상하이의 낮은 조용하고 어딘가 쓸쓸했으며 그렇기에 그 도시에 얹어진 화려한 색감들이 들뜨기보다는 아련하게 느껴졌다.
도시가 밝지 않고 들뜨지 않아서 좋다.
첫날 늦은 오후의 상하이 시내를 걸어가며 눈에 담은 이 느낌이 내가 상하이를 오랫동안 마음에 품게 된 이유가 되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들어가기 전, 골목에서 파는 중국식 부추 빵을 하나 사 먹었다. 중국의 음식은 어딜 가서 무얼 먹어도 강한 향신료 때문에 입에 안 맞을 거라 생각했지만 상하이는 워낙 많은 외국인들이 살고 있는 세계적 대중화가 된 도시이다 보니 누가 먹어도 거부감이 없는, 이국적인 맛이지만 평범한 맛의 저렴한 간식들이 많았다.
다행이었다. 난 원체 음식에 대한 도전 의식이 없고 유일하게 변화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먹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하이 음식만큼은 이국적이지 않고 낯설지 않아 좋았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웠다. 긴장이 풀렸던 탓인지 눈이 스르르 감겼다.
잠들면 안 되는데, 하는 찰나 늦은 낮잠이 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3시간가량이 지나서야 난 잠에서 깼고 창밖 너머의 공기의 색이 더 이상 채도가 느껴지지 않다고 깨달았을 즘 난 아차 하며 일어났다.
이 소중한 시간을 바보같이!
난 얼른 머리를 다시 빗고 눈곱을 떼고 나갈 채비를 했다. 하지만 몸이 천근만근 피곤하고 무거웠다. 원래 첫날 저녁과 밤은 난징동루[南京东路]의 화려한 도시를 걷고 아이쇼핑도 하면서 밤거리를 구경하려 했었다. 그리고 난징동루를 거쳐 와이탄으로 이르는 길을 걸어가며 동방명주 야경까지 볼 계획이었다. 난 정말 동방명주를 너무 보고 싶었다. 여행 첫날부터 동방명주를 볼 것이고 매일 밤마다 보리라 다짐했건만 몸 상태가 엄두가 나질 않았다. 어제까지 물류 센터에서 일을 하고 잠도 거의 못 잔 채 이곳으로 왔으니 몸살이 난 것은 당연했다.
아픈 몸으로 동방명주를 보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갈까 하다 중국으로 오기 전 한국에서 미리 찾아둔, 호텔에서 가까운 케이크 집이 생각났다. 늦은 저녁이지만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달달한 케이크를 먹으며 남은 하루를 고요히 시간을 보내는 편이 컨디션을 회복하는 데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호텔에서 걸어서 약 15-20분 정도.
2월의 상하이는 한국보다는 덜 추웠지만 나름 쌀쌀해 도톰한 봄버 재킷에 가벼운 목도리를 하고 길을 나섰다. 상하이는 밤늦은 시간에도 자동차나 버스보다는 스쿠터와 자전거로 도로가 붐비었다. 길을 건너는 횡단보도의 동선은 낯설었다. 하나, 둘, 셋 하고 파란불이 켜지면 건너는 사람들과 멈추는 차량들 간 정확한 규칙이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퇴근길의 시민들과 배달 기사로 보이는 수많은 스쿠터 운전자들이 회전하며 도로를 휘감고 계속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느낌이 위협적이거나 위험한 느낌이 아니어서 더 신기했다. 신호가 바뀌면 건너는 사람과 멈추는 운전자들이 서로의 갈 길을 배려하며 신호를 지켰지만, 스쿠터들의 끊임없는 행렬이 만들어내는 동선은 신호와 무관하게 계속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동선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느낌이라 신기하게 바라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20분 남짓 걸어 도착한 한 슈거 프리 케이크 카페 'BUTTER%'.
관광객은 거의 없는 현지인들이 자주 가는 카페인 듯했다. 이곳을 찾아둔 이유도 그래서였다. 관광지 맛집이 아닌 것 같아서. 이곳에서는 조용히 아는 이 없이 낯선 여행자이자 이방인의 마음으로, 하지만 익숙한 커피와 케이크를 음미하며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카페 내부는 작고 아담했다.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듯한 여학생이 전부였다. 물론 늦은 시간이라 손님이 붐비진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진열되어 있는 케이크들의 화려하고 안온한 색감은 피곤하고 아픈 몸 때문에 가라앉은 내 기분을 금 풀어지게 했다. 그리고 딸기 케이크와 피스타치오 케이크. 이렇게 두 가지로 주문했다. 벽에 머리와 어깨를 기댈 수 있는 가장자리의 2인석에 앉아 5분 정도 기다리니 점원이 두 가지 맛의 케이크와 포크까지 예쁘게 세팅하여 가져다주었다.
슈거 프리의 너무 달지 않고 부드러운 맛.
내가 평소 좋아하는 나를 위로하는 맛.
낯선 이국 땅에서 익숙하지만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 단맛에, 어딘가 마음이 울컥해지는 상하이의 맛.
내가 상하이를 모티프로 케이크를 만든다면 짙은 홍차와 어울리는, '외로운 단맛'이 나는 케이크를 만들 거라 생각했다. 외로운 단맛이라... 씁쓸할 정도로 짙은 홍차와 어울리는 부드러운 생크림의 목 넘김과 화려하지만 심플한 색감의 시트와 적당히 달한 과일향이 느껴지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감기로 살짝 부어 따끔거린 목을 데운다.
피스타치오 케이크 한 입, 딸기 생크림 케이크 한 입을 번갈아 음미하며 벽면에 몸을 기댄다. 창가에 앉은 두 여학생들은 여전히 노트북 삼매경이다. 점원들은 작은 목소리로 서로 이야기하며 웃기도 한다. 나는 그 대화의 내용을 알지 못하지만 작게 들리는 말소리를 들으며 괜히 혼자 슬쩍 웃는다.
작은 카페에는 익숙한 팝송이 흘러나온다. 창밖 너머로 바삐 지나가는 스쿠터들이 보인다.
2025년 2월 20일, 상하이에서의 첫 밤이 흐른다.
19일이었던 어제는 물류 센터 출고 마감에 쫓겨 마른 목에 촉촉한 초코칩 두어 개를 쑤셔놓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었다. 그런데 하루 새 외국의 어느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노라니 그간 생계형 히키코모리로 살며 어디론가 떠날 생각조차 못 했던 지난날들이, 그저 잘 버텨온 자신이 떠올랐다. 환경을 바꾸고 세상을 이동하는 건 내 의지대로 되지도 않고 전혀 바뀌지 않는다고 여겼건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가 만들어낸 고립된 세상만큼은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었구나를 느낀다.
환경을 바꾸고 세상을 이동하는 건 내 의지대로 되지도 않고 전혀 바뀌지 않는다고 여겼건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가 만들어낸 고립된 세상만큼은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었구나를 느낀다.
호텔로 다시 돌아갈 채비를 한다. 그리고 내일은 화려한 동방명주를 보며 이 넓은 대륙에 온 평범한 이방인답게 하루를 보내리라 생각하며 카페 마감 시간이 다 돼서야 남은 아메리카노 한 잔을 꿀꺽 넘기고 다 먹지 못한 케이크는 포장해서 카페 문을 나섰다.
다음 이야기는 [70만 원으로 떠나 마주한 것 - 상하이 上海_3]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