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나의 일상생활에서 공통점이 있다면 매일 아침 학교로 향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는 1년에 두 번 소중하고도 소중한 방학이 주어진다. 안타깝게도(한편 다행스럽게도..) 아빠는 예외라, 우리의 방학 기간 내내 직장에서의 휴가를 얻어낼 수 없으니 방학을 맞이함과 동시에 우리는 셋만 제주로 향한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모든 방학을 제주에서 보냈으니 벌써 6번째이다. 방학이 빠듯해서 한달살이는 못해봤고 길어봤자 2주 정도의 시간이 허락된다.
# 제주도 도서관
한 학기 내내 아이들과 씨름한 나도, 일하는 엄마를 둔 덕에 학교가 끝나면 이어지는 빠듯한 학원스케줄에 지친 아이도 제주도로 떠나면 아무것도 안 하고 오로지 쉰다. 아이는 읽을 책과 일기장만 챙긴다. 그러다 이제는 책도 챙기지 않는다. 제주도에는 한달살이 오는 관광객들을 위한 도서 대출 서비스가 거의 완벽하다시피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다음날 다른 도서관에서 반납할 수도 있고, 제주도민이 아니어도 도서관 책이음카드만 있으면 언제든 대출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제주도에서 꼭 도서관을 다닌다. 방학에만 갈 수 있는 제주도는 여름은 너무 더워서, 겨울은 너무 추워서 사실 여행에는 적합하지 않다. 제주도를 가는 이유는 여행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쉼'을 위한 것이기에 어떤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책만 보다가 돌아오는 길에 맛있는 식사를 한 끼 사 먹고 하루를 마무리하기도 한다.
집 앞 도서관을 두고 제주도까지 가서 도서관을 가냐고 남편은 투덜대지만, 당신은 '여행'을 왔다고 생각해 서서 그런 거고 우리에게 제주는 여행의 목적이 아니기에 뒹굴고 멍 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득(좋게 말해서 설득이지 강요)한다. 물론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 와서 굳이 도서관을 가려면 많은 밑밥을 깔아 두어야 가능한 일이긴 하다. 여름에 아이는 바다로 뛰어들고 싶어 하고, 겨울에는 눈밭에서 뒹굴고 싶어 하니 맛있는 것도 사주고 게임도 한판 시켜주고 어르고 달래 도서관으로 데려가기만 하면 아이는 시원하고 따뜻한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 뒤져가며 몇 시간을 훌쩍 보내곤 한다.
# 제주의 여름
제주에서 보내는 여름 스케줄은 아주 단순하다. 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숙소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 잔 마신다. 아이들은 바다에 갈 채비를 다 하고 나왔기에 래시가드를 입고 카페로 직행한다. 래시가드를 입고 가도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는 건 여기는 제주고 우리는 관광객이기 때문이겠지. 이런 자유로움을 일상에서는 느껴볼 수 없기에 쾌감을 느낀다. 카페를 가는 건 오로지 나를 위한 일정이다. 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아이들은 잠깐 유튜브도 보고 만화책도 본다. 엄마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허락해야만 하는 아이들의 자유시간.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에너지 충전을 가득해야만 뜨거운 바다로 나갈 수 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해변에 앉아있는 건 참으로 곤욕스럽다. 아이는 물속에 풍덩 들어가 놀아서 더운 줄 모르지만, 물놀이 싫어하는 엄마는 뜨거운 모래사장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타들어갈 것 같다. 아들은 전생에 어부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바닷가에서의 수렵활동에 몰입한다. 온갖 물고기들을 잡으러 뛰어다니고, 꽃게 새우 등 잡은 모든 생물들을 본인만의 아쿠아리움을 만들어 넣어둔다. 그리고는 주변 아이들을 불러 모아 한바탕 브리핑을 한 후 아이들과 아쿠아리움을 확장하기도 하고 다시 놓아주고 잡기도 하며 해 질 녘까지 신나게 논다. 나는 파라솔 아래서 자외선 차단을 위한 온갖 무장을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지만 결국엔 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물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1일 1 카페 1 바다를 매일매일 찍으며 단순하고도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셋 다 새까매져서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
# 제주의 겨울
한 겨울의 제주는 복불복이다. 따뜻한 날씨면 육지의 봄날처럼 따뜻해서 겉옷을 벗고 놀 수 있지만 바람이 너무나 매서워 눈이 오거나 추운 날에는 꼼짝없이 바깥활동 금지다. 다행히 우리가 겪은 3번의 제주는 폭설과 강추위는 피했기에 아이들과의 짧은 제주 살이도 큰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래도 겨울인지라 아이들과의 바깥활동은 자유롭지 못하기에 주로 여름 물놀이하느라 가보지 못했던 박물관, 체험시설 등을 하루 한 개씩 도장 깨기 하며 알차게 보낸다. 이제 아들은 10살이 되어 나보다 검색에 능수능란해져서 저녁을 먹을 때면 다음 날 어디를 가보면 좋을지 스스로 찾아본다. 5살 딸아이도 있어서 둘의 서로의 취향과 수준에 맞추어 스케줄을 짜기는 참으로 어려우므로 (사실은 귀찮아서) 아들에게 다음 날 계획을 짜는 전권을 주었다. 제주에 오면 파워 J형 엄마는 '아무것도 안 해' 병에 걸려 정말이지 아무것도 안 한다. 나는 오직 내가 가보고 싶은 카페와 맛집만 판다. 우리는 제주에서 겨울을 보내는 시간 동안 동백꽃도 보러 가고, 귤 따기 체험도 가고, 아이가 좋아하는 레고도 실컷 구경하고, 온갖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았는데 그 모든 것은 내 아들의 계획하에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이만하면 잘 키운 아들하나 웬만한 가이드 부럽지 않다.
이렇게 매번 방학을 제주에서 보내는 우리가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일탈을 계획했다. 역시나 일상에 지친 어느 날,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베트남 항공권 핫딜을 득템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