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고작 며칠 남짓 주어지는 시간에 우리는 매년 새로운 곳을 찾아 어디로 갈지를 고민한다. 나 역시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휴가 기간에 맞춰 어디로 떠날지 정하고 숙소를 예약하는 일이 휴가의 첫 번째 단계였다. 그랬던 우리의 휴가는 아이가 생긴 후 달라졌다. 어디로 갈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의 휴가지는 늘 제주도이기 때문이다.
지난 브런치북에도 연재했듯이 아이와 나의 첫 제주도는 남편의 출장을 따라나서면서부터였다. 남편과 나는 출장을 겸한 제주 첫 여행을 시작으로 여름과 겨울 휴가만 되면 셋이 제주도로 떠났다. 제주도는 비행기를 탐으로써 여행을 떠난다는 설렘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 주었고, 아이를 데리고도 충분히 갈 수 있는 맛집과 카페들이 많았고, 늘 보던 복잡하고 차가운 도시와는 다른 푸른 바다와 비밀스러운 초록숲을 언제든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제주도와 친해진 어느 날, 드디어 나는 아이와 단 둘이 제주 여행을 결심한다.
아이가 30개월쯤 되었을 무렵, 3년간의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직이 눈앞으로 다가온 9월의 어느 날이었다. 이대로 복직을 하면 이제 아이와 자유롭게 여행 가는 건 못하겠구나. 더군다나 이렇게 좋은 가을날에는 어쩌면 평생 여행을 못 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보, 복직하기 전에 제주도나 다녀올까?"
"지금은 회사일이 바빠서 휴가를 못내. 겨울에 가자."
"아니, 여보 말고 진이랑 나랑 둘이말이야."
내 남편이 누구인가. AI가 인간에게 장착되었나 싶을 정도로 입력이 되면 바로 실행이 되는 남편은 나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제주도 왕복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한 후 내 앞에 들이밀었다.
"자, 다녀와."
이건 뭐지? 우리 둘을 보내고 혼자 있고 싶다는 건가. 그냥 가지 말까.
나의 충동적인 생각에 남편의 실행력이 더해져 나는 30개월 된 아들과 둘이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후회했다. 한 손에는 일주일의 짐이 가득 담겨 지퍼만 열면 터질 것 같은 캐리어를 끌고, 한 손에는 유모차를 밀며 렌터카하우스를 찾아가는 고작 10분이 한 시간은 넘게 느껴졌다. 아이는 칭얼대고 짐은 많고 날씨는 덥고 내가 또 제주도까지 와서 고생을 하게 생겼구나. 내 팔자 내가 꼰다는 말이 이런 건가 싶다.
다행히 렌터카를 무사히 빌리고 아이를 카시트에 앉히는 순간 아이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건 아이스아메리카노! 네이버지도를 열어 드라이브스루가 되는 카페를 찾았다. 선택지는 롯데리아밖에 없었다. 제주도까지 와서 롯데리아가 웬 말이냐. 어쩔 수 없이 롯데리아로 차를 돌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는 그대로 해안도로로 달려갔다. 시원하고 파아랗고 상큼하기까지 한 물빛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뒷 자석에는 아이가 자고 있고 (비록 밍밍하기만 한) 아이스아메리카노까지 있으니 여긴 천국이었다.
'그래, 내가 천국 같은 순간을 누리려 여기까지 왔구나.'
혼자 감상에 빠져 제주도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는데 얼마가지 않아 정적을 깨는 소리.
"엄마!"
아깝다. 나의 천국은 여기까지.
아이는 눈앞에 바다를 보고는 소리 지르더니 당장 바자로 가자고 했다. 머리를 빠르게 굴려본다.
'오늘 계획은 더럭 분교에 가보는 거였는데. 더럭 분교는 주말밖에 가 볼 수 없는 곳이라 오늘 아니면 못 가는데.'
더군다나 우리는 아직 호텔 체크인도 하지 않은 상태. 물놀이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은데 어찌 바다를 간단 말이냐 아들아. 하지만 아이를 설득하는 것보다 내가 포기하는 게 빠른 길. 에라 모르겠다, 가까운 이름 모를 해수욕장에 차를 대고 햇빛을 가려줄 우산 하나 챙겨서 바닷가로 들어갔다.
그리고 내게 허락된 또 다른 천국. 아이는 고운 모래와 잔잔한 파도를 장난감 삼아, 어디서 주워온 쓰레기 같은 것들을 모아 열심히 놀았다. 나는 우산을 쓰고 모래사장 위에 앉아 그저 아이가 노는 걸 바라만 보면 되었다. 세상에, 이런 육아 천국이 다 있다니!
그때까지만 해도 외동이었던 아이는 잠시도 혼자 놀지 못하고 "엄마, 놀아줘"를 입에 달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미 정신을 차린 후에는 아이의 옷은 이미 흠뻑 젖었고, 바다에 갈 계획이 전혀 없었기에 운동화를 신고 온 나는 바다로 뛰어드는 아이를 붙잡느라 이미 신발마저 다 젖은 뒤였다. 평소였다면 이런 난감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엄청난 스트레스에 머리채를 쥐어잡았을텐데 웬일인지 아무렇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게 나 스스로도 신기했다.
이미 해수욕장은 폐장을 한 후였기에 샤워시설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편의점에서 생수를 몇 통사서 헹군 후 캐리어에서 손에 먼저 잡히는 옷을 꺼내 대충 아이를 갈아입히고 젖은 신발을 신은 채 길 건너 보이는 마트로 향했다.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아이와 일단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나누어 먹었던 그 순간. 축축한 신발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신나게 물에서 놀고 나와 아이스크림을 핥아먹는 아이를 바라보는 그 순간이 아이스크림보다 더 달콤했다.
아이와 둘만 떠나는 건 첫 여행이다 보니 걱정되고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일주일 스케줄을 쭈욱 적어왔었다. 그러나 도착 첫날부터 계획이 어그러졌으니 앞으로도 그러할 것 같았다. 이제부터 계획 없음을 계획했다.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어디든 나가 본다. 그러다가 바다나 놀이터가 보이면 그곳에 주저앉아 해가 질 때까지 놀기도 했다. 아이는 어디에서든 잘 놀고, 무엇이든 잘 먹어주니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맛집과 카페도 둘이서 데이트하는 것처럼 가 볼 수 있었다. 바닷가에서 낚시하는 아저씨가 잡아 올린 물고기를 구경하기도 하고, 돌멩이를 주워 바닷가에 던져보며 놀기도 하고, 카시트에 앉아 노래도 부르고 조잘조잘 이야기도 하며 여행을 즐겨주었다.
늘 계획하지 않은 의외에 순간에 찾아오는 행복이 더 크게 느껴지는 법. 평소의 나는 어떠했는가. 하원한 아이와 어떻게 놀면 좋을지 놀이 스케줄 마저도 짜놓던 내가 아니던가. 아이는 아무것도 계획되지 않은 여행에서 오히려 즐거움을 찾았고,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정말 '육아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곳 제주는 아이와 내게 천국을 선물해 주는 곳이구나. 제주도를 더 사랑하게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아이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이는 평소에도 엄마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고, 자주 노래를 불렀으며, 어디서든 열심히 잘 놀았다. 달라진 건 나의 태도였다. 평소 같았으면 아이의 수다에 귀찮아서 "응, 응." 대답만 하고 넘어갔을 텐데, 평소 같았으면 고작 30분 아이와 놀아주는 것도 힘들어했을 텐데. 여행을 오면 숙제처럼 쌓여만 가는 끝나지 않는 집안일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단순한 육아의 세계에 갇힌 복잡한 나의 정신세계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다. 너그럽고 평화로운 내 마음은 아이를 더욱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다정한 태도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니 당연히 육아가 쉽고 편할 수밖에.
불안하고 걱정이 많던 나는 여행을 통해 아이의 성장을 느끼며 감사해하고 행복해하는 사랑 충만한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둘 만의 첫 제주여행은 내게 긴 여운으로 남아 복직 후에도 계속 아이와 제주도로 떠나게 만들었다. 비록 덥다 못해 뜨거운 한 여름의 제주, 칼바람이 불어대는 한 겨울의 제주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