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집안을 흔들었다.
행랑채에서 달려 나온 달이 어멈은, 댓돌 위에서 신을 꿰던 양이를 보며 불안한 눈빛으로 속삭였다.
”누가 이런 시각에...?“
곧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일세, 문 좀 열어주게.“
-호였다.
양이와 어멈이 대문을 밀자, 찬바람 사이로 호와 장이가 들어섰다.
"장이야... 네가 여기까지 어떻게...”
양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장이는 입꼬리가 잠시 올라가는 듯하더니 이내 말투를 가다듬고 말했다.
“누부야, 오랜만입니더.”
한 뼘은 더 큰 장이의 모습에 양이는 반가움에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 순간, 호가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양이, 짐을 간단히 꾸려주게.“
"이 밤에... 예?"
달이 어멈이 되묻자, 호가 머뭇거림 없이 말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세. 지금은 서둘러야 하네.“
어멈과 장이가 그의 말에 안채로 들어가자, 호는 의원으로 자리를 옮겨 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양이도 조심스레 그 곁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양이의 가슴에는 말할 수 없는 불안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스승이 먼저 입을 열어주기를 기다렸다. 호는 한동안 입술을 다문 채 앉아 있다가 마침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새벽 동이 뜨면, 장이와 함께 암자로 몸을 피하거라. 오늘 마호 신부님도 중국으로 떠나셨다. “
양이는 놀라 눈을 들어 호를 바라보았다.
"저는 한양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스승님 곁에 있고 싶습니다."
양이의 말에 호는 고개를 돌려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처음 본 건...
삼 년을 떠돌다 다시 조선 땅을 밟던 날이었다. 일본에서 사흘을 꼬박 바닷길로 달려와 부산항에 닻을 내렸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지. 나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주막으로 들어가 국밥 한 그릇을 시켰다.
수저를 들려던 찰나, 마당 한켠으로 가마 하나가 들어섰다. 문이 열리자 흰 상복에 흰 쓰개치마를 두른 여인이 내려섰다. 단정히 틀어 올린 머리에 작은 비녀 하나, 얼굴에는 슬픔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그러나 마루 끝을 밟아 오르는 순간-
하얗게 숨죽인 버선발이 눈을 찌르듯 들어왔다. 차갑고도 고요한 그 흰빛이, 가슴 깊은 데로 가늘게 파고들었다."
호의 목소리가 잠시 흔들렸다.
”그 발걸음에 그만 나는 수저를 입에 대지 못하고 그대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오래전, 마음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 하나가 문득 나를 덮쳤다.
조선을 떠나기 전, 죽은 누이의 얼굴을 보고서야 그녀가 내 피붙이였음을 알았던 그날. 마지막으로 본 누이의 주검 아래, 치맛자락 사이로 드러나 있던 흙투성이의 흰 버선발- 그 발끝 또한 그만큼이나 시렸다.
그 후, 너를 돌봐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나 역시 누구를 보살필 여유도 처지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너를 세상 밖으로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은, 마루 끝을 밟고 서던 그 작은 버선발 때문이었지.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겠다는 말과는 달리, 불안에 일렁이던 내 어린 누이의 눈빛이- 그날의 너와 겹쳐 보였다.”
호는 미안함과 아쉬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양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또다시 죽음이 두려워 달아나지 않게... 해다오. 그것이 네가 해줄 수 있는 일이다.“
말을 마친 뒤, 호는 처음으로 양이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가 조용히 놓았다. 그리곤 더 머뭇거리지 않고 문을 열어, 어둠 짙은 골목으로 걸어 나갔다.
”스승님-!“
양이가 다급히 부르며 뒤따라 나갔지만, 호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홀로 남은 양이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스승님의 일을 문중에 고하고 상소문까지 직접 쓰셨다고요? 스승님을 존경한다, 스승님처럼 되고 싶다... 그렇게 말씀하신 분이 왜 그러셨습니까?”
양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림 속에는 원망과 슬픔이 얽혀 있었다. 신유는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서늘한 바람 사이로 그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사람들은 나를 흠 없는 임씨 집안의 자손이라 부르지만... 실은 문중의 천덕꾸럭이였지요.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 뒤, 문중에서 떠받드는 형님의 그늘 아래에서 자란 내 마음이- 그 일을 시킨 겁니다.”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정작 그 반쪽짜리 양반 형님은 문중 어른들이 떠받드는 귀한 분이었습니다. 둔황에서 강도에게 당해 길바닥에 버려졌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문중 어른들은 나를 불렀습니다. 돈을 쥐여주며, 가 보라고 했지요.
나는 둔황으로 가는 길 내내 수차례 강도를 만났습니다. 돈을 지키고 목숨을 부지하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형님을 찾았을 때, 그는 걸인처럼 돌바닥에 엎드려 있었지요. 그런데도 그 눈빛은... 이상할 만큼 빛나고 있었지요.
배운 의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떠들어대며, 자기 몰골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신유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형님은... 늘 희망으로 가득한 분이었습니다. 그 빛 속에서... 내 절망이 더 또렷해졌지요.”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걸 깨닫고 난 뒤부터였습니다. 형님이 어느 순간, 내가 더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그 웃음도, 그 웃음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도... 질투가 났습니다.”
신유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대는 정말 몰랐습니까? 내 눈길이 늘 그대를 쫓고 있었다는 걸.”
양이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하긴... 그대의 눈은 언제나 형님만을 향해 있었으니 모를 수도 있겠지요. 그대가 세상을 향해 보내던 그 맑은 눈빛... 그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희망을 느꼈습니다. 지긋지긋한 삶의 어둠에서 벗어나면, 언젠가 그대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그런 어리석은 꿈 말입니다.”
신유는 자신을 비웃듯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마주하니, 모든 게... 나 혼자 만든 착각이었군요.”
그의 눈가에 맺힌 것이 슬픔인지, 분노인지... 차마 분간할 수 없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를 바라보던 양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스승님은... 당신의 미움도, 절망도 다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침묵하신 거예요. 모른 척 감싸 안으면서도, 어떻게든 길을 찾으려 애쓰셨습니다. 당신을 버려둔 게 아니에요. 그 미움이 병이 되기 전에... 어떻게든 치유하려고 서역 말을 가르치신 겁니다.”
말을 잇던 양이는 끝내 목이 메어 멈췄다. 그녀의 눈빛에는 연민을 넘어선 단념이 어려 있었다. 신유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양이는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침묵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발걸음은 흔들렸지만, 울음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의금부의 어두운 담벼락 그늘 아래, 양이와 달이 어멈은 숨을 죽인 채 교대 시간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양이는 떨리는 손끝으로 쓰개치마를 고쳐 쓰며 얼굴을 깊이 감췄다. 잠시 후, 나졸 하나가 다가왔다. 그는 주변을 재빠르게 훑어본 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옥사 뒷문 쪽으로 둘을 이끌었다.
그 순간, 달이 어멈은 손에 꼭 쥐고 있던 전냥 주머니를 슬그머니 그의 손에 밀어 넣었다.
문이 열리자 곰팡내와 피비린내가 뒤섞인 퀴퀴한 공기가 콧속 깊이 파고들었다. 옥사 안은 등잔불 하나 희미하게 깜빡일 뿐, 발밑조차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웠다.
달이 어멈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어둠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 호가 정좌한 채 앉아 있었다. 며칠 새 눈에 띄게 야위어, 손목뼈가 불쑥 드러나 있었다.
양이는 숨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르던 달이 어멈은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흐느꼈다.
”없이 사는 사람들 돌봐주고, 마지막 가시는 어무이 소원 들어드렸으면... 나라님이 상을 줘야지,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랍니꺼?
끼니 때마다 밥이 불어터지도록 빌고 또 빌고, 제사 지내듯 정성을 다 바쳤는데... 도련님, 신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단 말입니꺼! 아이고, 이런 꼴을 보면, 신이고 귀신이고 다 소용없는 기라!“
달이 어멈은 가슴을 치며 눈물을 훔치다가, 끝내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옥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남겨진 양이는 호를 바라보았다. 쇠약한 그의 얼굴이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더 허옇게 떠올랐다. 무너지는 마음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양이는 소쿠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보자기를 살며시 풀었다.
“스승님... 요기라도 조금 하세요. 종일 아무것도 못 드셨을 테지요.”
호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양이의 손끝에 쥐어진 수저가 허공에서 멈췄다.
“스승님께서... 졸지에 이런 고생을 하시다니...”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양이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가슴속이 미어졌다. 그때, 호가 낮고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야말로... 이런 밤중에, 장이와 떠나지 않고 어찌 아녀자 몸으로 여길 왔느냐.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어서 돌아가거라.”
양이는 눈물이 그렁한 채, 무릎으로 기어 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스승님... 왜 모든 걸 그냥 받아들이십니까. 제발 살아 주세요. 저는 지금까지 스승님만 따라 걸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여기서 함께 걸음을 멈춰야 합니까?”
호는 한참 동안 양이를 바라보았다. 마치 마지막 순간, 눈에 담아 두려는 사람처럼. 잠시 숨을 고른 뒤, 나직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말로... 네가 꿈꾸던 삶을 살아야지.”
양이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숨을 고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주막에서 처음 스승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저는 그 목소리에서 이국의 자유를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도 그 자유를 꿈꾸게 되었지요.
하지만 스승님과 함께 지내며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자유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님과 제가 함께했던 사람들, 바로 그들 안에 있었다는 것을요.”
양이의 눈가가 천천히 젖어 들었다.
“스승님과 함께한 모든 시간이 좋았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 하루를 시작할 때도, 저녁에 해가 저물어 하루를 마칠 때도... 언제나 스승님이 제 곁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스승님이 들려주시던 그 기도 속에서- 지나간 하루를 돌아보고, 다가올 내일을 이야기하던 그 시간이... 저는 가슴 벅차도록 좋았습니다.”
호는 말없이 양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는 아픔과 미안함이 겹겹이 스며 있었다.
“이런 제가... 스승님이 안 계신 시간을... 과연 살아낼 수 있을까요?”
긴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 호가 낮게 입을 열었다.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죄인이었다. 아들이면서도 아들이 아니었고, 결국 내 존재는 두 어머니의 삶을 짓눌러 버렸지. 그러니 이제 이 목숨으로라도 갚게 해다오. 그 빚으로부터... 나는 이제 자유롭고 싶다."
양이는 한참을 망설였다. 가슴속이 저며 왔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와 함께... 자유로울 수는 없으십니까?”
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리고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양이는 무너졌다.
그의 품으로 몸을 던지듯 안기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은 한참이나 어둠을 울리며 메아리쳤다.
호와 함께한 날들은 양이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으나, 이제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이별로 남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