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플라워

by 릿다




톡.
공기 속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났다. 의식하지 않으면 흘려보내기 쉬운,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소리였다.

톡.

나는 온몸에 힘을 모아 위로 몸을 밀어 올렸다. 눅눅한 흙이 나를 붙들고 늘어졌다. 쉽게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기척, 아직 이름조차 붙지 않은 충동이 쉼 없이 나를 밀어 올렸다.


마침내 연약한 초록의 잎 하나가 흙을 가르며 올라왔다. 마치 허락을 구하듯 흙 사이를 조심스럽게 비집고 나왔다. 잎끝이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빛은 낯설었고 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어머, 잎이야. 싹이 돋았어!”


놀람과 기쁨이 섞인 목소리가 위에서 내려왔다. 노랗고 작은 화분, 그 안에서 이제 막 싹을 틔운 어린 생명. 그것이 바로 나였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내가 누군가의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신기해... 이렇게 작은 너도 자라면 꽃을 피울까?”


소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숨결이 잎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이라기엔 너무 부드러웠고 햇살이라기엔 습기가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온기에 잠시 흔들렸다.

소녀는 코를 가까이 가져와 냄새를 맡았다. 아직 아무 향도 갖지 못한 나를 향해.

“무슨 꽃을 피울까? 잎만 봐서는 나무인지, 꽃인지 모르겠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나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너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데.”

난처한 듯 얼굴을 찡그리던 소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꽃. 플라워로 하자.”


그녀는 나를 향해 말하듯, 또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덧붙였다.
“꽃이 피지 않는 나무라면 네 이름은 꽃잎이 되는 거고, 꽃이 피면... 네 이름 앞에 네 꽃 이름을 붙여 줄게.”

그녀는 분명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 뜻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름이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안녕, 플라워. 나는 아그네스야.”


그녀가 웃었다. 그 순간 그녀의 미소는 봄날의 첫 꽃송이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아직 추위가 남아 있는데도 가장 먼저 피어나 주변을 안심시키는 꽃처럼 따뜻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내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나를 빛이 겨우 스며드는 작은 유리창 곁으로 옮겨 주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희미했고 따스함도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 빛이 몸을 감싸자 나는 처음으로 이곳이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나는 방 안을 둘러보고 다시 아그네스를 올려다보았다.

씨앗으로 남아 있던 시절의 기억들이 물 위로 떠 오르듯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었다. 잊고 있던 감각들, 아직 말이 되지 못한 이미지들이 나를 적셨다.


아그네스는 회색 원피스에 회색 두건을 쓰고 있었다. 십대 후반쯤의 나이였다. 맑은 피부는 그녀를 유난히 단정하게 보이게 했고, 호박빛 눈은 어딘가를 오래 바라보는 사람처럼 깊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희망을 몸에 품고 있는 사람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가늘었다.
몸은 말라 있었고 작은 슬픔에도 쉽게 꺾일 것처럼 보였다. 차가운 돌벽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그녀를 끝내 견디지 못하게 만들 것만 같았다.


그리고 깊은 밤, 나의 불안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아그네스는 작은 나무 침대 위에서 몸을 움크린 채 잠들었다. 잠결에도 종종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울음은 소리가 되지는 못한 채 몸 안에서만 맴돌았다.


어둠 속에서 종이 울리면 그녀는 늘 급히 일어났다. 아그네스는 익숙한 동작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방 한켠에 놓인 세면대에서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고, 짧은 머리를 대충 빗어 넘긴 뒤 회색 두건을 눌러썼다. 두건 아래에서 그녀의 얼굴은 더 하얗고, 더 창백해 보였다.

“플라워, 다녀올게.”


그녀는 늘 나를 향해 말했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아그네스는 기도실로 향했다.

여기는 수녀원이다. 곧 종소리가 멎고, 그 자리를 대신하듯 투명한 노랫소리와 기도의 음성이 공간을 채웠다.


그 소리는 벽을 타고 흐르며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 소리를 흙의 속삭임처럼 받아들이며 꾸벅꾸벅 졸다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쪼르륵—

차가운 물방울이 온몸에 떨어지자 나는 눈을 떴다. 아그네스가 노래를 부르며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물은 흙 속으로 스며들며 나를 깨웠고, 나는 잎끝을 가만히 떨었다.

“주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바다와 강물을 마련하셨으니

주께 조배드리라. 알렐루야-”


낮고 고요한 노랫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그 소리는 기도처럼 들리기도 했고, 때로는 혼잣말처럼 나에게까지 닿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나는 지금껏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흙 속에 묻혀 있던 기억들마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진 따뜻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마치 신의 축복처럼.

“플라워, 오늘 미사에서 누굴 만난 줄 알아? 그분이야. 그분.”


아그네스의 눈은 반달처럼 휘어졌고 얼굴에는 황홀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화분을 바닥에 내려놓고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분은 하느님이자... 나의 아버지와 똑같은 분이셨어.”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분을 뵙고 오면 천상의 주님을 만나고 온 것 같아.”


그러다 문득 그녀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빛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처럼. 아그네스는 조심스럽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플라워, 너를 이 방에서 데리고 나가지 못하는 게 너무 안타까워.”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덧붙였다.
“너에게도 그분을 보여 주고 싶은데. 너도 분명 천상의 주님을 뵈었다며 기뻐할 텐데.”


나는 대답하고 싶었다. 잎끝에 남아 있던 물방울 하나를 온 힘을 다해 떨어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 아그네스는 맑은 웃음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은 그녀의 노랫소리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 오래, 쉽게 사라지지 않고 마음에 머물렀다.



며칠 후, 아그네스는 문이 부서질 듯 방문을 닫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곧장 침대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숨도 고르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말을 잃고 기도했다. 방 안에는 그녀의 떨리는 숨결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창가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가 바닥 위에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녀는 일어섰다. 그리고 내가 있는 창가로 다가왔다. 손이 창틀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나에게로 옮겨졌다.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이곳을 떠나신대.”


그녀는 내 잎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이제 정말 혼자가 되는 거야.”


손끝이 떨렸다.

“아버지는 새어머니가 원하시는 건 뭐든 들어 주셔.”

아그네스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말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새어머니가 내가 수녀가 되길 원하신다고 하자, 나는 집이 아니라 이 수녀원에서 살게 된 거야.”

그녀는 말을 멈췄다. 그 사이 방 안의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아버지는 새어머니도, 아그네스도 사랑하신다고 했는데...”


숨을 들이마신 뒤 겨우 말을 이었다.

“왜 아버지 곁에서 살고 싶다는 내 소원은 들어 주지 않으실까?”

그녀의 눈은 물에 잠긴 것처럼 젖어 있었고, 떨리는 목소리는 귀를 기울여야만 들릴 만큼 점점 더 작아졌다.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건... 너뿐인 것 같아.”


그 슬픔이 너무 커서 나는 나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뿌리에서부터 밀려 올라온 어떤 힘에 떠밀리듯.

“그분이 계시잖아. 주님과 꼭 같은 그분이.”


내 마음이 전해진 걸까. 아그네스는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다시 떨구었다.

“맞아. 그분도 계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그분은... 아그네스만의 그분은 아니잖아.”


똑. 투둑.

아그네스의 눈물이 내 푸른 잎 위로 떨어졌다. 비처럼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스치기만 해도 상처를 남길 것 같은 차가운 물방울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삶은 멈추지 않았다. 아그네스와 나는 봄을 견뎌 냈고, 어느새 여름이라는 시간 속으로 밀려들어 갔다.


뜨거운 태양이 세상을 불태우고 있었지만 아그네스의 방에는 날마다 더 짙은 적막과 고여 버린 우울이 쌓여 갔다. 햇빛은 창을 통해 들어왔지만 방 안 어디에도 머물지 못했다.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침묵은 벽처럼 굳어 있었다.

나는 그 무게가 싫어 하루라도 빨리 꽃을 피우고 싶었다. 그러나 내 잎은 푸르기만 할 뿐 꽃망울은 좀처럼 맺히지 않았다.

물을 주며 아그네스는 종종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녀는 화분 앞에 오래 서 있었다.

“플라워... 너에게만 들려줄 이야기가 있어.”


그녀의 떨리는 음성에 나는 잎끝을 곧추세웠다. 그 떨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으면서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분이...”


아그네스는 말을 멈췄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분이... 나를 특별하게 바라보고 있어.”

아그네스는 확신하듯 말했다. 망설임 없이.
“정말이야. 이건 착각이 아니야. 분명 나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


오랜만에 다시 들은 ‘그분’이라는 말에 아그네스의 기쁨이 그대로 전해져 내 안의 무엇이 뛰기 시작했다. 뿌리 깊은 곳에서부터 두근거림이 올라왔다. 나는 그것이 기쁨인지, 불안인지 알 수 없었다.

아그네스는 내 앞에서 아름다운 수가 놓인 비단 손수건을 살짝 흔들었다. 손수건은 빛을 머금은 채 흔들렸다.

“아름답지?”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그분이 내 눈물을 닦아 주셨어. 그분을 보면 기뻐서... 자꾸 눈물이 나.”

그 말고 함께 아그네스의 뺨이 붉어졌다.

그렇게 날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작은 방은 아그네스의 웃음으로 환해졌다. 방은 잠시나마 살아 있는 것처럼 숨을 쉬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아그네스는 창가를 오래 서성였다. 해가 지고 빛이 방 안에서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납작한 배에 조심스레 나를 갖다 대었다.

“들려? 아기의 숨소리?”


나는 화들짝 놀라 그대로 얼어붙었다. 내 기억 속의 수녀원에는 그런 미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던 시간에는 그런 장면이 존재하지 않았다. 두려움에 잎이 떨었지만 아그네스의 얼굴은 너무도 평온했고, 너무도 행복했다.


그 순간 내가 붙잡고 있던 시간의 기억이 무너졌다. 내가 알고 있던 기억이 틀렸고, 시간은- 세상은- 내가 믿어 온 방식과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비로소 나를 흔들었다.


그 깨달음이 그녀의 기쁨에 응답하듯, 그 순간 생긴 줄도 몰랐던 꽃봉오리가 열리며 마침내 꽃을 피웠다.

방 안 가득 퍼지는 향기, 창을 가득 채우는 샛노란 꽃잎. 꽃잎은 빛을 받아 반짝였다.

“플라워, 너 작은 소국이었구나.”


아그네스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그녀는 꽃 한 송이를 꺾어 자신의 머리에 꽂았다.

짧은 머리 위의 노란 꽃잎은 마치 수줍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꽃이 시들자 나는 다시 씨앗이 되기 위해 시간을 접었다. 그러나 홀로 남게 될 아그네스가 마음에 걸려, 나는 모든 잎을 떨구지 못한 채 마지막 문턱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아그네스가 들어왔고, 그녀의 뒤에는 한 청년이 있었다. 그의 품에는 아기가 안겨 있었다.

나는 더 이상의 미련 없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겨울잠에 들었던 나는 따스한 햇살과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깨어났다.

아그네스는 없었다. 회색 두건을 쓴 수녀들만이 방 안을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낯선 손들이 창을 열고 닫았다.

“새로 들어온 수녀는 아그네스 일을 모르니, 입단속을 해.”


낮은 목소리들이 공기처럼 흘렀다.

“원장 수녀님이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으셨어도 아그네스가 그런 짓을 하진 않았을 텐데...”

“무슨 소리야. 아그네스 수녀가 미친 거야. 영주님의 아이를 가졌다는 거짓말을 하다니.”


다른 수녀가 말을 이었다.

“영주님은 어릴 적 말에서 떨어진 뒤로 평생 자기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온 적 없는 분이잖아.”

“그래서 원장 수녀님이 새빨간 거짓말쟁이라고 하며 뺨을 후려치셨다잖아. 수녀원에서 나가라고 하신 것도, 수녀원의 수치라고 하신 것도 올바른 처사셨어.”


말들은 가볍게 떠다녔다.

“그런데 그 길로 성까지 달려가다니...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러겠어?”
“정말 뻔뻔한 아이야.”


그때 한 수녀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어머, 아그네스처럼 말라비틀어진 화분이 있어-”


시선들이 나에게로 몰렸다.

“보기만 해도 기분 나빠”.

“아그네스를 꼭 빼닮았어.”


두려움에 내 푸른 잎이 떨렸다. 나는 그녀들을 올려다보았다.

“버려 버려.”

나는 창밖으로 던져졌다.


퍽.

화단에 떨어지며 화분이 깨졌고, 뿌리에 붙어 있던 가느다란 줄기 하나가 끊어졌다. 얼마를 살았는지도 모를 생의 시간이 그 순간 뚝 끊어졌다.


높디높아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수녀원의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 아그네스도 이렇게 자유로웠을까.

끊어진 줄기에서 하얀 액체가 진득하게 흘러나왔다. 나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뿌리도 잎도 놓아버린 채.

그 순간 꺼져 가던 나의 숨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가볍게,

아주 가볍게
우주로 흩어졌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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