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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별 Dec 29. 2019

이런 적 처음이야

이야기 6. 처음

첫눈, 첫 소풍, 첫 봄, 첫 제주도, 첫 키스.

태어나 처음인 것들만 줄 수 있는 뜨거운 설렘이 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는 것을 싫어하진 않지만 한 해가 갈 때마다 나에게 처음인 것들이 줄어드는 것은 아쉽다. 

그 설렘은 중독과도 같아서 자주 느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은 꽤나 속상한 일이니까.


그런데 얼마 전 나에게 처음인 일이 생겼다.

크리스마스이브, 지인의 초대로 파티에 갈 기회가 있었다.

아는 사람 절반, 모르는 사람 절반. 이런 자리가 낯설기도 했지만 꽤나 즐거웠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들뜬 분위기, 맛있는 음식들, 좋은 사람들. 이 얼마나 훌륭한 조합인가!


신나게 놀다 보니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었다. 

밤을 새우며 놀아본 게 얼마만이더라.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며 웃고 게임을 하고, 그러다 보니 하루가 꼬박 새 버렸다.

즐거웠던 추억을 뒤로하고 일상으로 복귀, 여기까지는 행복하고도 평범한 추억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지난 며칠 후 네이버를 떠돌다 '고흐: 영원의 문에서'라는 영화가 개봉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개봉하기를 기다렸던 영화였는데 개봉했구나.. 하다가 

그 순간, 아! 이 영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되살아 났다.


크리스마스이브, 술이 중간중간 끊어놓은 기억의 조각 중 하나에 저 영화 이야기를 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내가 고흐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했고, 그 자리에 있던 한 친구가 본인도 고흐를 좋아한다고 했고, 내가 이 영화가 곧 개봉할 것이라는 말을 했었다. 


기억은 여기까지. 아마 우리가 나눈 이야기도 그 정도였겠지.

기억의 재생테이프가 다 돌아가고 난 후, 문득 그 친구와 이 영화를 같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왜 갑자기?

나조차도 의아한 의식의 흐름이었다. 

그러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그 친구에게 좋은 느낌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는 모습이 예뻤고, 충분히 안주할 수 있는 상황에서 도전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었다.

채 24시간도 보지 않은 그 친구를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친구에 대해 궁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나는 한 번도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먼저 연락을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맘에 들어한 모든 남자들이 다 나에게 먼저 다가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아도 다들 알겠지만 그래도 굳이 짚고 넘어간다. 그거 아니다)

어쨌든, 해본 적이 없다 보니 이게 너무너무너무 쑥스러운 거다.

내가 이 친구에게 퐁당 빠져서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거 영화 한 편 같이 보자는 말이 도저히 입에서(카톡 보낼 거니까 정확히는 손에서) 떨어지질 않는 거다.


친구가 나에게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할까?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야 연락해봐! 아님 말 고지 뭘 고민해!' 할 거면서, 내 문제가 되니 그게 안됐다. 아님 말고 가 안됐다.

30분 정도 고민의 시간을 거치며 머리를 쥐어뜯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그래! 아님말고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연락을 했다.

이거 개봉했다고, 영화 보러 가자! 는 못하고.. 뭐하냐고 보냈다. ㅋㅋㅋㅋㅋ(내가 생각해도 웃기네)

그게 고작 이틀 전, 하루정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오늘이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을 마무리 짓고 나서 그 친구에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해보니까 별거 아니네!라는 말은 못 하겠다.

뭐하냐는 글을 적고 보내는 화살표를 누르기까지 주먹을 몇 번이나 쥐고 폈던지, 누군가 나의 모습을 봤다면 저 사람 어디가 좀 불편한가?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나는 대차게 차일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창피해서 오늘 밤 이불 킥을 하다가 지쳐 잠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 나의 용기 있는 처음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내가 먼저 연락한 것!


아직도 처음인 게 남아서 좋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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