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보는 눈도 닮는다
가끔 악몽을 꾼다. 내게 악몽은 전남친이 등장하는 꿈이다. 한 번은 그와 결혼하려고 하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이건 아니야’를 수도 없이 외치며 도망 다니다 잠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이 나고 손발이 저렸다. 꿈에서 깨어나 내 옆에 곤히 잠들어있는 남편을 보았다. 깊은 안도와 한숨이 나왔다.
‘아, 다행이다. 이 사람이 내 남편이라서’
남편은 모른다. 내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에 얼마나 깊이 감사하고 안도하는지.
그와 헤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고 남편과 결혼한 지 3년 정도 지났을 즈음이었다. 그날밤 꿈은 나를 깊은 어둠으로 잠시 데려다 놓았다. 꿈에서 깨어났지만 선명한 기억이 되살아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꿈이었지만 끔찍한 기억이다.
남편을 만나기 전, 그러니까 내가 암울했던 시기에 만났던 그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왠지 사연 있어 보이는 남자에게 관심이 갔다. 얼굴에 슬픔이 드러나는 비밀이 많아 보이는 그런 남자에게 끌렸다. 그런 남자는 나쁜 남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도 그랬다.
그와 연애하며 많은 헌신을 했다. 마치 엄마가 아빠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것들이었다. 몸을 던져 사랑한다는 표현이면 적합할 것 같다. 그때 나는 불구덩이에 빠져도 그 사람을 놓지 못할 거 같았다. 여러 번 헤어지려고 다짐했다가 제자리를 맴돌며 3년의 시간을 허비했다. 그때는 그 남자를 내가 구제해줘야 할 것 같은 이상한 사명감까지 들었다. 어리석게도 그 사람과 결혼해 모든 걸 떠안을 각오까지 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만약 정말 그런 선택을 했다면 자칫 인생을 망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가 등장하는 꿈이 악몽이라는 것이다. 결혼을 하려는 꿈이라면 더더욱 끔찍한 악몽이다.
왜 그런 남자를 만났을까. 아닌 걸 알면서도 왜 헤어지지 못했을까. 그 남자는 아빠를 닮았고 나는 엄마를 닮았었다. 아빠에게 여러 번 기회를 준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나도 엄마처럼 그에게 여러 번 기회를 주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고 보니 아빠와 비슷한 남자와 결혼했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아빠와 비슷한 남자를 찾고 엄마, 아빠의 관계를 답습한다. 보고 자란 것이 그러하니 다른 선택을 하기 쉽지 않다.
누군가 내게 인생에서 바닥을 친 경험이 언제냐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그와의 연애라고 답할 것이다. 미친 사람처럼 소리도 질러봤고 길바닥에서 울부짖기도 했다. 지금의 나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테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 밑바닥이었다. 실패한 연애의 경험은 많은 교훈을 준다. 덕분에 남편에 대한 고마움과 안정된 결혼생활에 대한 감사함을 늘 가지고 산다.
엄마는 내가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날까 봐 걱정이었다. 절대 아빠 같은 사람은 만나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다. 누구를 만나도 연애를 시작할 때는 다른 줄 알았던 남자도 알고 보면 결국 아빠 같은 남자였다. 엄마는 내가 어떤 연애를 했는지 모른다. 내가 엄마를 닮아 희생하는 사랑을 했다는 걸 알면 엄마는 많이 속상해할 거다. 그래서 더욱 연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결혼을 일찍 했는데 행복한 가정을 꾸린 사람들을 만나면 부럽고 신기했다. 어떻게 시행착오 없이 좋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나는 좋은 사람을 알아보기까지 수없이 많은 고민과 실패의 경험을 겪어야 했다. 어쨌든 나는 결혼을 잘했다. 최종 종착지에 안전하게 안착했으니 다행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