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목소리에 힘이 없어? 딸한테 얘기해 봐.
- 네가 아빠한테 전화 좀 해봐. 그래도 딸이 하면 아빠가 받지. 모르는 척하고 네가 해봐.
어제 외가에 가서 마당 정리도 하고 풀도 뽑고 하느라 고생을 한 모양이다. 대충 마무리 지은 아빠는 그만 정리하자 피곤하다 나머지는 다음에 또 하자 했던 모양인데 엄마는 요거 하나만 더 마무리하면 두 번 손 안 가니 요것까지 다 해놓고 가자 했다는 것이다.
더위에 고단했던 아빠는 요거만 요거만 하는 엄마에게 뿔이 났고 쉬이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 집에 가 본인 볼일을 봐 놓고 엄마를 데리러 올 생각을 하고 가버린 모양이다. 그럼 집에 다녀올 테니 그동안 얼른 정리하라는 소리를 했어야 하는데 그때 마침 화가 난 입이 자물쇠를 채운 모양이다.
아들 없는 집 막내 사위로 명절마다 처가에 와 제사를 지내주고 장모 일이라면 두 말 없는 아빠에게 엄마는 늘 고마워했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로도 머리 희끗희끗한 나이 많은 세 사위들이 돌아가며 관리하는 걸 생각하면 엄마는 여전히 고맙고 미안해서 괜히 아빠의 심기를 더 살피게 되는 모양이었다.
날도 더운데 80 앞둔 나이 든 남편을 고생시키고 고단하니 그만하자는 말에도 욕심을 부린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말도 없이 사라진 게 서운하기도 하고, 그 말을 내게 전하면서도 목소리에 물기가 묻었다.
아빠도 아차 했을 것이다.
말을 안 하고 온 것도, 돌아보니 아빠가 없어 놀란 마음에 전화하려고 보니 핸드폰도 지갑도 엄마에겐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도. 그리고 금방 데리러 갈 생각인 걸 알 리 없는 엄마가 택시를 타고 돌아온 것도.
서운함과 미안함이 뒤섞인 무거운 밤을 보내고 아침 식탁에서 어제 얘기를 나누었던 모앙이다.
아빠는 아빠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미안함과 서운함을 털어놓았지만 그래도 가라앉지 않는 감정이 서로에게 있었던 모양이다.
아침 식사 후 나간 삼식이 아빠가 점심때 안 들어오고 저녁때가 다 되자 걱정이 된 엄마는 어디냐고 문자를 보내 놓고 편치 않은 마음으로 내게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 뭘 모르는 척하고 전화해. 내가 전화 걸면 아빠가 딱 알지. 그래도 모르는 척 할게.
- 아빠~
- 어. 딸!
- 아빠, 서울은 며칠 비가 왔는데 배추랑 무랑 지금 심어도 돼?
- 더워서 아직 좀 그럴걸? 찬바람 좀 불고 비 온 뒤에 심으면 좋지.
- 서울 며칠 비 왔는데.. 그럼 시금치는? 지금 씨 뿌려도 돼?
- 허허, 그런 건 엄마가 잘 아는데 엄마한테 물어봐.
- 응. 내비소리가 들리네.
- 응. 집 가는 중.
- 응, 운전 조심하고 얼른 가.
- 고마워.
텃밭 배추와 무. 시금치 얘기만 했지만 아빠는 알았을 것이다.
고마워란 말에, 대신 전한 엄마의 걱정을 아빠가 접수했다는 걸 내가 알았듯이.
잠시 뒤 엄마의 문자가 왔다.
- 아빠 집에 왔어.
- 응, 싸우지 말고 놀아.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