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들에게 재산을 몽땅 넘긴 할머니
어릴 적, 나와 여동생은 방학마다 외할머니집에 맡겨졌다. 목소리가 크고 성질이 급한 할머니는 열 살이나 먹은 내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며 곧잘 화를 냈다. "광에 가서 소쿠리 좀 가져오너라" 하면 난 광이 어딘지 몰라 헤매다가 "저 모자란 것!"이라며 구박 맞았다. 할머니는 쉬지 않고 일했다. 아침에는 깻잎을 땄고, 낮에는 딴 깻잎을 5장씩 모아 빨간 실로 묶었다. 깻잎을 실은 농협 트럭이 떠나면, 손가락에 물을 묻혀 색색깔의 셀로판지로 이쑤시개 끝을 꾸미는 부업을 했다.
늘 바빴던 할머니는 김치와 나물로 밥상을 차렸다. 여섯 살이었던 사촌 남동생은 국이 없으면 밥을 먹지 않고 고개를 젖혀 꺼이꺼이 울었지만,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독 사촌 동생이 시끄럽게 울던 어느 날 할머니가 콩나물무침을 슬며시 빼더니 물을 붓고는 모른 척 그 애 앞에 놓았다. 말도 안 되는 수법이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이 눈물을 뚝 그쳤다. 나를 보며 씩 웃던 할머니의 이가 노랬다.
삼십 대가 된 내게 각별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명절에만 보던 할머니가 화두로 떠오른 건, 2년 전 삼촌이 엄마를 찾아와 상속 포기각서를 받아 간 다음이었다. ‘포기’, ‘각서’ 같은 말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엄마는 도장을 찍었다. 평소 전화 한 통 없던 남동생이 찾아와 부탁할 정도면 꼭 필요한 일이려니 싶었다. 세금을 아낀다지 않나. 큰 이모도, 막내 삼촌도 같은 이유로 도장을 찍었다. 그 사실을 안 아빠는 잔뜩 화가 나 할머니한테 전화했다. “고생한 처제(큰 이모)는 챙겨줘야 한다”는 게 요지였지만, 할머니는 아빠가 재산 욕심을 낸다며 성을 냈고, 오해는 일파만파 퍼져 급기야 삼촌이 동문회에서 만난 엄마를 아는 체하지 않는 지경까지 갔다.
“삼촌은 양심도 없어? 왜 자기가 되레 화를 내면서 모른 척해?”
속상해하는 엄마가 답답해 그냥 다 잊자고 했지만, 정작 생각할수록 내가 분이 났다. 차라리 “내 재산은 몽땅 큰아들에게 주겠다”라고 할머니가 선언했다면 이렇게 배신감을 느끼진 않았을 거다. 할머니는 왜 다른 자식들을 속여 가며 삼촌에게 재산을 준 걸까. 속이는 방식이 분란이 덜할 거라 생각한 걸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분란 이후 네 남매가 모인 자리에서 할머니는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내 재산 내 아들 주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
언제부터 할머니한테 그렇게 “내 아들”만 중했던 걸까. 갑자기 할머니네 갈 때마다 안방에서 봤던 사진들이 떠올랐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위풍당당하게 알몸으로 찍은 사촌 남동생의 백일 사진, 학사모를 쓰고 꽃다발을 들고 찍은 사촌 오빠의 사진, 할머니 칠순 잔치에 찍은 손자들 단체 사진까지. 거기에 나는 없었다. 내 여동생도, 사촌 여동생도. 몇 번을 눈여겨보고는 했는데, 재산 문제와 겹치니 의심이 확신이 됐다.
“누가 보면 아들들만 있는 집인 줄 알겠다. 엄마, 나 이제 할머니네 안 올래. 아들들이랑 잘 살라고 해.” 재산 분쟁이 있던 해의 추석, 나는 선언했다. 엄마도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어째서 내 사진 한 장 받아서 걸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한 번도 품어보지 않았던 의문이 의심이 되고, 확신이 됐다. 명절마다 꼬박꼬박 갖다 드린 용돈 10만 원이 아까운 마음까지 들었다. 어차피 아들들에게 갈 돈 아닌가.
“할머니가 넘어져서 다치셨대. 이모가 할머니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나 봐.”
삼촌이 재산을 차지해 버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마음 한편 후련하기도 했다. 이제 할머니를 부양하는 일은 오롯이 삼촌 몫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 분노가 사그라들수록 나는 받은 것이 없으니 줄 것도 없다는 생각에 상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데 삼촌과는 합의되지 않은 계산이었다는 걸 엄마의 전화를 받고야 깨달았다. “삼촌은 뭐 하고 그 멀리 사는 이모가 병원을 모시고 가?” 물으니 엄마는 한숨 쉬며 말했다. “할머니가 삼촌 오면 밥 챙겨주는 게 더 번거롭다고 이모한테 오랬대.” 병원비도 당연히 이모 주머니에서 나가겠지. 돌봄 노동은 온전히 이모와 엄마가 하는데, 보상은 오롯이 삼촌 혼자 누렸다. 문득 여든의 할머니가 쉰이 넘은 삼촌의 앞 접시에 월남쌈을 싸서 놓아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어느 날, 외숙모들이 명절에 특식이라며 월남쌈을 준비했다. “뭐야, 이게.” 식탁에 올려진 날 것의 채소와 라이스페이퍼를 보는 순간, 삼촌은 성을 내며 안 먹겠다고 했다. “이리 와, 엄마가 하나씩 싸주면 되지. 배고파. 어서.” 그렇게 삼촌은 갈라진 틈마다 검게 물든 할머니의 손으로 싼 월남쌈을 받아먹었다. 돌봄은 왜 이렇게 일방적인가. 병원에 오지 않는 삼촌도, 그런 자식한테 재산을 몽땅 물려준 할머니도 지긋지긋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이 지겨웠다.
할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에 다신 안 간다는 내 선언은 무참히 꺾였다. 올해 설에도 엄마와 할머니네로 향했다. 점심 전에 와서 밥 먹고 가라는 할머니의 당부가 있었지만, 엄마도 나도 삼촌과 마주 앉아 밥을 먹기 싫어 오후 늦게 갔다. 비포장도로를 올라가니 물려받은 땅을 팔아 산 삼촌의 새 SUV가 길을 막고 있는 게 보였다. 멀리서 짧은 파마머리에 꽃무늬 바지를 입고, 보라색 고무 신발을 신은 할머니가 달려왔다. “연정아, 왜 이제 왔니. 이 할미가 너무 보고 싶었다.” ‘날 보고 싶었다고? 귀한 아들들 놔두고 왜?’ 괜히 심술이 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내가 너를 보고 싶어서 서울에 갈라고 해도, 머리가 멍청해 놔서 버스를 어떻게 타는지 몰라서 못 갔다. 몇 번이고 갈라고 알아봤는데도 영 모르겠어. 갈 수가 없어.”
주름진 눈가 사이에 맺힌 눈물과 파르르 떨리는 손을 보며, 난 당황스러웠다. 재산은 몽땅 아들에게 주지만, 손녀딸도 그리운 이 할매를 어떻게 해야 하나. 차로 30분 거리인 손녀딸의 집에, 택시를 타고 갈 수 있단 생각은 꿈에도 못 하는 이 할매를. 5년 전부터 할머니는 한글학교를 다니며 글자를 배웠다. 글자를 천천히 한 자 한 자 읽을 수는 있지만, 몇 번씩 읽고 나서 입으로 소리 내봐야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 할머니가 쌩하니 지나다니는 버스를 찾아서 나를 찾아올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방에 들어가 아들들 사진을 배경으로 앉은 그녀에게 세배를 하니, 농협 ATM기에서 가져온 알록달록한 노란 봉투를 건넸다. 작년에 깻잎 팔아 모은 돈이란다. 아, 그놈의 깻잎. 봉투에는 또박또박 ‘김연장(김연정)’이라고 적혀 있다. 그 오자가 웃겨 속으로 몰래 웃었다. 1만 원짜리 5장. 집에 와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고, 봉투를 책상 서랍에 깊숙이 넣어 보관했다. 삼촌에게 월남쌈을 먹이던 손으로, 연필을 잡고 또박또박 썼을, 내 이름이 적힌 봉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