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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Nov 30. 2021

한마음 호프

엄마가 15평 남짓한 호프집을 인수한 건, 내가 중학생이 되던 1999년이었다. 붉은 벽돌 건물의 2층, 하얀 고딕체로 ‘한마음 호프’라고 새겨진 진분홍색의 간판이 있는 곳. 다섯 개의 테이블에는 사이마다 나무 칸막이가 달려 있었고, 당시에는 꽤 유행하던 인테리어였다. 외벽을 둘러싼 통유리는 취객의 난동으로 금이 가기 전까지 세련됨을 뽐냈다. 엄마는 깨진 곳에 투명 실리콘을 발라 수리비 삼백만 원을 아꼈다. 가게를 인수할 때부터 안쪽에 실금이 가 있던 변기도, 손님들이 팔을 올릴 때마다 삐걱대던 테이블도, 물이 한 방울씩 똑똑 새던 온수가 나오지 않던 수전도 엄마는 큰돈 들이지 않고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고치며 22년 동안 한마음 호프를 운영했다.


새벽 3시, 퇴근한 엄마 몸에서는 담배 냄새가 났다. 어린 난 엄마가 간접흡연으로 죽는 건 아닌지 마음을 졸였다. 2013년, 호프집과 음식점에서 흡연이 금지된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먼저 떠올린 것도 엄마였다. 술잔을 연거푸 세 번이나 깨뜨릴 정도 취했는데도 술을 더 가져오라며 소리 지르는 사람, 어두운 호프집에서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엄마가 자기를 무시하는 눈으로 봤다며 벌컥 화를 내고 의자를 부수는 사람, 돈이 없다고 버티다 맥주병을 깨고 그 파편으로 자기 팔을 찌르는 사람. “여자 혼자 장사하니까 만만하게 보는 거지.” 이골이 난 사람처럼 엄마는 말했다. 지난 22년간 엄마의 핸드폰 즐겨찾기 4번은 112였다.    


“문 열고 들어오는 폼만 봐도 딱 알아. 받을 놈인지 아닌지.” 들어온 손님이 너무 취했다 싶으면 문 닫을 시간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가끔 왜 안 닫았냐며 다시 따지러 오는 ‘놈’도 있었다. 한마음 호프 사장님은 기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취해서 안 받는다고 하면 기분 나쁘지 않겠어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취객을 받지 않는 술집이라니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고1 때 부모님이 다투는 소리를 듣고야 그 이유를 알았다. “당장 가게 때려 쳐.” 성난 아빠의 목소리, 조각조각 들려오는 이야기의 파편을 맞추어 나는 경찰서에 앉아 있는 엄마를 떠올렸다. 그 옆에는 술값을 내지 않겠다며 버티다가 술병을 깨 자해를 한 손님이 피범벅인 채로 앉아있다. 다음 날 술이 깬 그 손님은 엄마에게 사과했을까.  


“생맥주 가져갈까?” 내가 성인이 되자 엄마는 가끔 나와 한잔하고 싶어 했다. 엄마가 구워주는 먹태, 그리고 청양고추와 쯔유 살짝 넣은 마요네즈 양념장은 환상의 궁합이었다. 파, 마늘, 고추를 송송 썰어 끓여주는 번데기탕도 단골 메뉴다. 엄마는 안주에 자부심이 있었다. “손님들이 다 ‘사장님 손맛 좋다’고 해. 다른 가게는 떼다 파는데 나는 직접 만드니까 좋아하지.”     


어려 보이는 손님이 오면 내게 문자를 보냈다. “OO년생이 몇 살이니?” 젊은 애들이 왜 허름한 술집을 찾을까 싶었는데, 허름해서 만만했던 거다. 돈 몇 푼 아쉬워 미성년자도 받는 가게일 거라 생각한 그들은 종종 신분증도 없이 찾아왔다. 한마음 호프 사장님은 생각보다 더 철벽이었다. 신분증을 보여줘도 석연치 않으면 돌려보냈다. 20살도, 21살도 ‘빠꾸’를 맞았다. 우리 딸처럼 얼굴이 애기 같다는 이유였다. “돈 몇 푼에 양심을 파냐” 성을 내듯 말하는 엄마의 얼굴에서 자부심이 묻어났다.     


소도시의 지하철역 바로 앞에 있어 손님이 끊이지 않던 한마음 호프는 10년이 지나자 하향세로 접어들었다. 허름한 가게를 새로 찾는 손님은 없었고, 불경기로 그나마 오던 단골들도 발걸음이 뜸했다. 엄마가 가던 모임에서는 언제까지 뒤풀이를 한마음 호프에서 할 거냐며 쓴소리가 나온다고 했다. 출근 전, 큰 솥에 삼계탕을 끓이거나 잡채를 하는 엄마에게 잔치하냐고 물으면 “단골들 줄 거”라고 답했다. 맨날 와서 팔아주는데, 가끔 이런 특식이라도 해야 군말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모임까지 나가 눈치 보나 싶어 벌컥 화가 났다. “엄마 가게 좀 그만하면 안 돼?”


엄마가 호프집을 시작한 건 공무원이었던 아빠가 음주운전으로 해고당한 뒤였다. 십 대 내내 내가 먹던 밥과 입던 옷과 쓰던 핸드폰까지 모두 한마음 호프 사장님의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걸 나는 쉽게 잊었다. 가족 모두 그랬다. 복직한 아빠는 “괜히 술장사 오래 해서 애들 혼삿길을 막는다”라며 속없는 소리를 했다. 동생도 나도 돈이 안 되니 고생하지 말고 접으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빚더미에 앉지만 않으면 다행이라는 게 가족 모두의 입장이었다. 듣다 못 한 엄마가 말했다. “너희는 몰라. 장사라는 게 잘 될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는 거지. 장사는 그냥 내 삶이야. 자존심도 자부심도 다 거기서 나온다고.”    


지난해 6월, 엄마에게 전화하니 가게 공사 중이라고 했다. “공사? 무슨 공사?” “엄마 이제 은퇴한다.” IMF 때도 손님이 이렇게 없지는 않았다며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된 지 일 년 반 만에 엄마는 가게를 접었다. 월세만 까먹고 앉은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 없다고 했다. 그나마 남은 보증금도 밀린 월세와 깨진 유리창 수리비, 철거비로 나갔단다. 엄마의 22년 일터가 그렇게 사라졌다. “엄마, 가게 접으니까 허전하지 않아?” 물으면 엄마는 말했다. “다들 잘 접었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더 했다간 빚더미였을 거야.” 공무원이었던 아빠는 퇴직할 때 상패도 받고 퇴직금도 받았는데, 엄마가 사람들에게 받은 건 빚 떠안기 전에 손 털기를 잘했다는 격려였다.     


오랫동안 한마음 호프가 엄마의 일터이자 안식처라는 사실을 몰랐다. 한마음 호프가 사라지고서야 엄마가 해왔던 말이 들렸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 여기가 내 일터구나, 나도 갈 곳이 있구나’ 싶었어.” 엄마의 갈 곳은 이제 어디일까. 한마음 호프가 문을 닫은 지 일 년도 넘었는데, 나는 작은 호프집에 갈 때마다 엄마가 떠오른다. 벨을 눌러서 사장님을 부르는 게 싫어서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카운터에서 주문한다. 안주가 맛있으면 계산할 때 “맛있어요, 사장님.”라고 용기 내어 말한다. 신용카드를 테이블 위로 던지지 않고, 두 손으로 건넨다. 늦었지만, 엄마의 손님들이 엄마에게 해주었으면 했던 사소한 행동들이다. 나는 곳곳에서 아직 은퇴하지 않은 ‘한마음 호프’ 사장님들을 만난다.


얼마 전, 친구들과 술집을 찾다 누군가 낡고 오래된 호프집을 가리키며 "우리 저런 데 갈까?"라고 말하자 모두 깔깔대며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웃을 수 없었다. 그곳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담은 일터이자 유일한 갈 곳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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