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행처럼 오는 사랑은 없다
“선배! 우리 친하게 지내면 안 돼요?”
2008년 3월, 연우는 연극동아리 개강파티에서 만난 한 살 어린 후배였다. 그 애의 당돌한 질문에 나는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그 뒤 이삼일에 한번 술 마시자는 문자가 왔다. 150cm에 뽀글뽀글한 단발머리를 한 통통한 여자애. 비슷한 헤어스타일이 많아 그 애의 얼굴을 외우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던 연우는 매일 술자리에 날 불러냈고, 우리는 그렇게 가까워졌다.
당시 나는 동아리에서 만난 남자동기와 사귀었는데, 그 역시 하루가 멀다 하고 신입생들과 술을 마셨다. 그가 연우를 비롯한 신입생 여자애들과 등산을 다녀온 후, 꿈을 꿨다. 동아리방 앞에서 연우가 내 남친에게 분홍색 편지를 건네는 꿈이었다. 누가 봐도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남친이 바람이라도 핀 듯 기분이 나빴다. 한참 후에야 나는 그때 연우가 아닌 남친을 질투했다는 걸 알았다.
연우는 선배인 나를 “야”, “너”라고 불렀다. 연우가 자취하는 집에 가면 “손부터 씻어!”라고 소리쳤다. 동기들은 선배한테 반말한다며 흉을 봤지만, 나는 연우의 그런 거침없음이 좋았다. 하루는 장난을 치다 연우의 배를 손가락으로 꾹 찔렀다. 친구와 그런 장난을 치지 않던 나는 순간 당황했는데, 연우는 태연했다. 난 뱃살은 숨겨야 하는 것이라고 배웠고, 그래서 앉을 때는 가방을 꼭 끌어안았고, 누군가 실수로 내 배에 스치기만 해도 깜짝 놀라 움츠렸는데, 연우는 꿈쩍하지 않았다. 몸은 그저 몸이라는 듯 다른 사람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연우가 나는 좋았다.
술에 취하면 남친과 놀다가도 연우네 집에 가서 잤다. 남친이 “친구가 그렇게 좋냐”며 아직 어린애라고 비난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 연우밖에 없었다. 남친과 헤어질 때도 연우와 술 마실 핑계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연우네서 낮잠을 잤다. 잠에서 먼저 깬 내가 책상에 앉았는데, 노트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TO.성훈”으로 시작하는 편지였다. 성훈은 나의 남자 동기였다. 둘이 친했던가. 얼마나 정성 들인 편지면 초고를 노트에 먼저 적은 걸까. 나는 한 구절에서 멈췄다. “선배, 내가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지?”
연우와 나는 매일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어떻게 모를 수 있었을까. 연우는 편지 속에서도 당당했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그냥 말하고 싶었다, 군대에서 잘 지내고, 나오면 얘기하자. 살면서 고백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나는 연우의 그런 당참에 한번 더 반함과 동시에 가슴이 찢기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잠든 연우를 놔둔 채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연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 그 애가 내 동기라는 거, 연우가 이성애자라는 거 모두 충격이었다.
얼마 후 동기 남자애가 연우에게 선후배로 지내자고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그 자식이 미우면서도 기특하고, 짜증 나면서도 부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연우를 위해서면 죽을 수도 있는데! 그 자식은 남자라는 이유 하나로 연우의 사랑을 차지했다.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년 뒤, 연우한테 진짜 남자친구가 생겼다. 복학생 선배였다. “나 남친 생겼어.” 연우의 전화를 받은 후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열이 펄펄 끓는 몸살에 걸렸다. 아파서 누워있는데 눈물이 줄줄 났다. 엄마는 그렇게 아프냐며 놀랐지만, 감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숨 쉴 때마다 심장이 찢기는 고통을 다시 느꼈다.
그 후 난 연우네 갈 때마다 ‘못 생겼지만, 마음만은 최고라는’ 남친이 준 꽃과 인형을 목격해야 했다. 그런데도 연우에 대한 마음이 접어지지 않았다. 술에 취하면 어김없이 연우에게 전화했다. 연우는 생일을 남친과 보냈지만, 나는 해리포터 양장본 전집을 선물로 보냈다. 연우가 남친과 싸운 날이면 달려가 함께 술을 마셨다. 하지만 기대과 달리 연우는 10년 넘게 그 남친과 만났다.
스물여섯, 연우를 만난 지 5년째 되던 해 나도 드디어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민준이라는 동아리 선배였다. 연우에게 가장 먼저 민준을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다. 연우는 내 절친이었으니까. 그 말을 들은 연우가 얼굴이 환해지며 “야, 당장 민준 오빠 불러”라고 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연우는 정말 나를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까지도 연우가 혹시 질투하지는 않을까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좋아하는 감정에서 한 걸음만 물러나도 보이는 걸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처음 정식으로 커밍아웃을 한 상대도 연우였다. 내 나이 서른두 살이었고, 연우를 만난 지 11년 되던 해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통화하고, 대학 때부터 함께 마신 술병을 세워도 우리 학교 백 바퀴는 돌릴 터인데, 그때까지 연우에게 커밍아웃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라는 기대로, 나중에는 친구 사이마저 깨져 다시 못 볼 거라는 두려움에, 그 후로는 남자친구가 생겨서. 갖은 이유로 못하던 커밍아웃을 여자 애인이 생기며 하게 됐다. “연우야, 나 여자친구 생겼어.” 연우는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특유의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 누군데?” 그날 우리는 합정역 근처에서 술을 먹다 한강까지 걸었다. 그리고 나는 11년 만에 묻어둔 고백을 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 같았다. 연우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었고, 소중한 친구였기에 끝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 너 좋아했어. 너 처음 만났을 때부터 5년 동안 쭉.” 다 지난 일인데도 꼭 현재진행형처럼 심장이 떨렸다. 연우는 말했다. “진짜? 나 몰랐어.”
황당했다. 확실히는 아니어도 어렴풋이는 알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연우가 부르면 친구들하고 술을 먹다가도 달려갔다. 5년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했고, 해리포터 양장본 전집을 사준 얘기는 입만 아프다. 연우가 갖고 싶다고 했던 작은 인형, 캐릭터가 달린 연필, 보고 싶다던 책까지 기억했다가 선물로 준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얼마나 더 티를 내야 아는 건가. 내가 어이없어하자 연우가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나 진짜 몰랐어. 말을 하지.” 그러면서 연우는 나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자기도 양성애자인 거 같다고도 말했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이 오랜 짝사랑의 원인이 내가 여자라서가 아니라, 고백하지 않아서였다는 것을.
돌아보면 재밌는 건, 내가 연우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면서도 동성애자라고 밝히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수군거릴 거고, 나는 휴학이나 자퇴를 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죽는 것보다 동아리에서 추방당하는 일이 더 두려운 이십 대였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난 지금, 연우에게 빨리 고백하고, 더 빨리 차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연우를 짝사랑하는 동안, 나는 나를 미워했다. 내가 (지정성별) 여자라서 싫었고, 동성애자라서 싫었다. 연우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가 나에게 있는 것만 같았다.
연우를 좋아한 5년 동안 나는 많이 앓았고, 입맛을 잃은 채 삐쩍 말랐지만, 그 아픈 시간을 통과하면서도 배운 것이 있다.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그래서 솔직하게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하지 않는 이상 요행처럼 오는 사랑은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늘 내가 누구인지 드러내는 용기로부터 시작했다. 나는 연우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그것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