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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Feb 03. 2023

중학교 때 내 별명은 터프걸이었다

동성애자를 미워하는 마음은 어디서 배운 걸까


중학교 때 내 별명은 ‘터프걸’이었다. “야, 봄밤 터프걸 같지 않냐.” 그 말을 처음 듣는 순간 난 얼굴이 빨개졌다. 시작은 이소영이었다. 내가 남자처럼 성큼성큼 팔자로 걷고, 행동이 거칠어 여자 같지 않단다. 이소영이 누군가. 갓난아기 때부터 알았던 나의 엄. 친. 딸이자,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수재,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들을 따돌리던 우리 학교의 최고 권력자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터프걸’은 반마다 한 명씩 있었다. 그중 힙합바지를 입고 짧은 머리에 늘 껄렁하게 걸어 다니던 옆 반 ‘유지애’가 가장 유명했다.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였다. 술에 잔뜩 취한 유지애가 찾아와 이소영을 불렀다.


“야! 이소영, 나와.”


이소영의 이름을 호기롭게 부르던 유지애는 방으로 들어오다 입고 있던 힙합바지에 걸려 넘어졌다. 넘어진 뒤에도 헤어진 연인을 찾아온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며 이소영의 이름만 부르다 같은 반 친구들 손에 끌려 나갔다. 이소영이 이미 질린 표정으로 다른 방으로 가버린 뒤였다.


한 달 전만 해도 이소영은 학교에 오자마자 유지애부터 찾았다. 15년을 봐온 친구지만, 이소영이 누군가를 그렇게 챙기는 모습은 처음 봤다. 슈퍼집 딸이었던 이소영은 가방에 매일 과자를 가져왔는데, 누구와도 나눠 먹지 않았다. 소꿉친구인 나조차 예외는 없었다. 그런데 유지애와는 과자를 나눠 먹었다. 유지애 이야기만 나오면 함박웃음을 지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친하지도 않던 옆반 애와 왜 갑자기 급식을 같이 먹고, 소풍을 가야 하는지 친구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둘이 손을 꼭 잡고 화장실을 갈 때마다 “쟤네 진짜 사귀는 거 아냐.”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문을 의식해서일까. 아니면 남모르는 이유로 싸우기라도 한 걸까. 이소영은 언젠가부터 유지애를 찾지 않았다. 수학여행에서 그 사건이 있은 후로는 둘이 절교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한참이 흐른 뒤, 우연히 이소영과 내가 탄 엘리베이터에 유지애가 탔다. 침묵이 감돌던 엘리베이터에서 그 애가 먼저 내리자 이소영이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쟤 완전 호모야. 전에 우리 집 왔을 때 내 가슴 만졌어.”


순간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숨을 죽였다. 이소영 얼굴에 퍼지는 경멸의 미소가 꼭 나를 향하는 것만 같았다. 무슨 말이든 빨리 이 애의 감정에 동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가슴을 만지다니? 여자끼리? 그것도 중2가? 여자 친구들을 보며 설렌 적은 많았지만, 스킨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이소영은 왜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내게 한 걸까?


그전까지 난 이소영이 유지애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반인 유지애를 쉬는 시간마다 불러내 손을 잡고 다니고, 같이 급식을 먹고, 교실에서 껴안고 팔을 쓸어내린 것도 다 이소영이었다. 어느 날은 “우리 오늘부터 1일이다.”라고 선언도 했다. 이소영의 진심은 무엇일까. 남자가 없는 여중에서 유지애는 그저 재미를 채워줄 ‘유사 연애 상대’에 불과했던 걸까. 하지만 유지애가 안 보일 때마다 그 애를 찾던 이소영의 다급한 눈동자를, 유지애를 뒤에서 안을 때 웃던 이소영의 함박웃음을, 유지애와 끼던 이소영의 깊숙한 팔짱을 난 기억했다.


이소영의 이런 모호한 태도는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신촌공원에서 문희준 칼머리를 하고 힙합바지를 입은 여자애들이 레즈비언의 상징으로 찍혔을 때, 나는 안심했다. 칼머리만 아니면 되었다. 그 선명함 뒤에 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모호한 경계는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심지어 자극했다. 칼머리가 아닌 여자친구들이 서로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때, 껴안고 웃고 떠들 때, ‘나도 저래도 될까?’하는 마음이 슬며시 올라왔다. 친한 친구인 이소영이 유지애를 좋아하는 걸 보면서는 더 그랬다. 나도 좋아하는 여자애가 자주 짓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에 대해, 그 애가 좋아하는 로커에 대해, 그 애만의 특이한 저음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그 엘리베이터에서 나의 기대는 철저히 무너졌다. 서로 좋아한다고 믿었던 사람과의 스킨십이 저렇게 끔찍한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구나. 그것도 사랑하던 사람의 입을 통해서.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들킨다는 건, 그런 일이구나. 진심을 보이는 순간, 나도 저렇게 손가락질당하겠구나, 각인됐다.


그 뒤로는 백일이라며 백 원을 걷고 다니는 여자애들을 봐도, 덤덤했다. 그것은 일종의 놀이였다. 진심이 담기지 않았기에 혹은 철저히 숨겼기에 위험하지 않은 놀이. 그들이 진짜 동성애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걸 묻지 않는 게 핵심이었다. 친구들 대부분 그 애들이 성장해 어른이 되면 당연히 남자를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 동성애는 미숙한 어린아이들의 장난일 뿐이니까. 동성애가 진심이 되는 순간, 그것은 도려내야 하는 끔찍한 ‘호모’가 되었다.


동성애자를 비웃고 미워하는 마음은 모두 어디서 배운 걸까. 그날 이후 나는 유지애가 이소영의 가슴을 만졌다는 소문이 돌까 봐 긴장했다. 소문이 퍼진다면 유지애처럼 ‘터프걸’이라는 별명을 가진 나도 의심받을 게 분명했다. 아이들은 힙합바지를 입고, 남자애들처럼 팔자로 걷는 나 같은 ‘터프걸’들이 사실 ‘걸’이 아니라 여자를 좋아하는 ‘호모’라고 생각할 것이다. 적어도 나의 경우 ‘터프걸’이자 ‘호모’인 게 사실이었다.


‘터프걸’에서 ‘걸’까지 떼일 위기에 처한 나는 숨을 죽였다. 친구들이 남자 이야기를 하면 관심도 없던 내가 “걔는 잘 생겼어?”라고 물었다. 친구들과 레코드사 앞에 줄을 서서 H.O.T 앨범을 샀고, 오빠들 사진이 담긴 브로마이드를 못 받을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척을 했다. 책받침을 이효리에서 장우혁으로 바꿨다. 그가 제일 ‘남자다워’ 보였고, ‘남자다운’ 사람을 좋아해야 내가 ‘남자다워’ 보이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내게 고백하는 여자 후배에게 “그런 건 남자에게 하는 거”라고 훈계하고, 오래 후회했다. 거짓말은 나를 지키는 '보호용 마스크'였지만, 마스크가 두꺼워질수록 내가 만끽할 수 있는 공기는 희박해졌다. 문구점에 나온 장우혁의 사진을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 그리고 그 표정이 내가 생각해도 자연스러웠을 때, 문득 이렇게 나 자신까지 평생 속이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유혹에 빠지면서도, 정말 자신까지 속이는 삶을 살게 될까 두려웠다.


소문은 퍼지지 않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고, 이소영과 유지애의 일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유지애는 귀밑까지 오던 짧은 머리를 어깨까지 길었고, 더는 터프걸로 불리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난 말수가 줄었다. 매 순간 없는 마음을 지어내는 건 생각보다 많은 노동을 요했다. 어느 날, 롯데리아에서 친구들이 세 시간을 넘게 수다를 떨었다. 아무 말 없던 나를 발견한 한 친구가 말했다. “어? 봄밤도 같이 있었네.” 나는 늘 거기 있었다. 나를 지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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