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에 내 이름을 검색하는 부모님
아빠는 가끔 네이버에 내 이름을 검색한다. 내가 연극할 때 했던 인터뷰나 기고한 글들을 귀신같이 찾아 내 가족 카톡방에 올린다. 왜 세상은 눈부시게 발전해서 아무나 검색해도 사진과 글이 나오는 걸까. 학창 시절 성적표를 가져가도 본체만체하던 아빠가 왜 이제 와서 나의 사회적 성취에 관심을 가지는지 모르겠다. 그 흔한 “공부해라” 소리 한 번 한 적 없던 아빠 아닌가. 덕분에 성소수자로 사는 이야기를 브런치에 올릴 때마다 내가 사는 지역이나 나이, 하는 일 등 나를 특정할 수 있는 표현은 검열한다. 혹시 아빠가 나를 알아볼까 봐. 커밍아웃할 생각은 강아지 눈곱만큼도 없지만, 낮은 확률로 한다 해도 그런 식으로 아웃팅 당하고 싶지는 않다.
“시금치 따서 들기름 비빔밥으로~” 아빠가 가족 카톡방에 보낸 사진에 나도 마침 해놓은 배추전이 있어 사진을 보냈다. 양이 많아 보였는지, 엄마가 말한다. “조금만 먹어. 배탈 나.” 엄마, 이거 2인분이야. 애인하고 산 지 벌써 3년째라고. 말하고 싶지만, “네” 한마디면 끝날 일이다. “같이 사는 친구랑 먹는 거예요”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같이 사는 친구”에 부모님이 관심 두는 순간, 우리가 왜 같이 사는지 궁금해하는 게 싫어서. 같이 사는 그럴싸한 이유를 지어내는 게 싫어서. 매번 답이 달라지지 않도록 한번 말한 이유를 기억하는 게 싫어서. 거짓말하는 게 그냥 싫어서. 사진을 보낼 때마다 애인의 밥그릇과 수저를 쏙 뺀다. 부모님에게는 딸이 레즈비언인 것보다는 밥을 좀 많이 먹는 게 나으니까.
이대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나는 솔직하지 못했던 순간들을 후회할까? 매일 안부를 묻고, 혹여 보이스피싱을 당할까 사건, 사고 뉴스를 보내고, 오늘의 식단을 사진으로 공유하는 부모님에게 정작 가장 아끼는 애인 이야기는 하지 못한다. 부모님 집에 갈 때마다 커플링을 빼고, 애인과 대화하는 카톡방 알림을 끈다. 웬 반지냐고 물을까 봐, 애인이 “보고 싶다”라고 문자를 보낼까 봐. 어떨 때는 내가 너무 도려내 너덜너덜해진 사진 같다. 한동안 부모님이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괜히 화가 났다. 정말 내가 누구인지 알아도 사랑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혹시 부모님도 아는 건 아닐까 싶은 순간들도 있었다. 남들 다 하는 “결혼하라” 소리 한 번 하지 않을 때, 친구와 같이 사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을 때, “남친 있어?”라는 질문 한 번 하지 않을 때. 어렴풋이 아는 게 아닐까 희미한 기대를 했다. 그러다 아빠가 옛날에 알던 어떤 “호모 새끼”에 대해 말할 때, TV에 나온 레즈비언을 보며 엄마가 “이해가 안 간다”라며 인상을 쓸 때 그런 기대가 얼마나 허황했는가 싶어 헛웃음이 나온다.
TV를 같이 보던 그날 무슨 용기가 났는지 엄마에게 장난치듯 물었다. “엄마, 내가 저러면 어떨 거 같아?” 엄마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밥상으로 내던졌다. “그러면 호적 파버릴 거야.” 숟가락이 떨어지며 먹고 있던 국과 반찬이 엄마와 내 얼굴, 가슴, 상 위로 마구 튀었다. 당황한 난 화제를 돌렸다. “엄마, 호주제 없어진 지가 언젠데. 이제 호적 못 파.” 엄마는 모른다. 십 년 전 그날 호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 마음에서 파였다는 걸. 혹시 엄마가 날 받아줄지 모른다는 작은 기대가 그날 내게서 뿌리 뽑혔다.
난 부모님 말고는 친구와 직장 동료, 글쓰기 수업 학인까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커밍아웃하는 편이다. 커밍아웃에 난이도가 있다면 내게 가장 쉬운 건 처음 보는 사람이다. 처음 보는 이가 내가 성소수자인 걸 반대(?)한다 한들 어쩔 것인가. 게다가 쌓인 시간이 없기 때문에 오랜 시간 상대를 속였다는 민망함으로부터 자유롭다. 오래 알던 사람에게 하는 커밍아웃은 그동안 사실 나는 네가 아는 것과는 다른 사람이었다는 고백이자 때로는 이성애자인 척 연기했던 나에 대한 폭로이다. 부모님의 경우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난 열 살쯤 알았으니까 그 세월이 근 삼십 년이다. “김치 싸줄까?” 같은 일상적인 대화 이상의 내밀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는 부모님에게 갑자기 “여자 좋아해”라는 말을 하는 건 “엄마, 아빠, 나 남자 좋아해.”라는 말만큼이나 낯간지럽다. 이성애자라고 모든 이야기를 부모님에게는 하지는 않으니까.
하루는 부모님과 추어탕집에 갔다. “애를 버너 앞에 앉히면 어떡해, 위험하게.” 엄마가 아빠한테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평소 무뚝뚝하던 아빠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버너를 자기 쪽으로 옮기는 게 아닌가. 직장을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적응에 애를 먹고 있던 때였다. 실수의 연발이었고, 실수 하나하나 나를 찌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내가 혹여 불에 델까 봐 애지중지하는 두 사람을 보니 이리도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있구나, 위안이 됐다. 한 달에 한 번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깨도 언제든 오고 싶을 때 오라고 말하고, 갑자기 찾아가도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로 싱글벙글 기쁜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두 사람이었다.
나는 그 버너 앞에서 알았다. 내 성정체성을 받아들이지는 못해도, 두 사람은 나를 사랑했다. 그 모순을 받아들이지 못해 나는 오래 아팠다. 이 년 전, 꿈에 엄마, 아빠가 나왔다. 두 사람이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봤고 나는 때가 됐다고 느꼈다. “엄마, 아빠 나 여자 좋아해.”라고 내가 입을 뗀 순간 미소를 띠며 그들이 말했다. “다 알고 있었어. 괜찮아.” 꿈에서 깬 뒤 이불속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들은 버너 앞에 앉히지 않을 정도로 날 끔찍이 사랑했으나, 내가 바랐던 사랑은 꿈속에서만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부모님에게 하는 커밍아웃이 언젠가는 꼭 해내야 하는 과업처럼 느껴지던 때도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미디어만 봐도 온통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성공한 감동적인 성소수자의 이야기나 그 극단에서 평생 자신을 숨기고 사는 암울한 성소수자의 이야기뿐이었다. 또는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괴로워하는 이야기의 나열이다.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하면 나는 행복해질까? 커밍아웃하지 못한 나는 불행한가?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다.
더는 부모님에게 하는 커밍아웃을 풀어야만 하는 숙제처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 삶을 커밍아웃을 해야만 완성되는 미완성의 퍼즐로 느끼며 살고 싶지 않다. 어딘가 성소수자의 이야기가 기록된다면 어정쩡한 나의 이야기도 함께 전해지면 좋겠다. 오픈리 게이*와 벽장, 그 사이 어디쯤 오늘도 “이런 거 스팸이니까 링크 누르지 마세요.”라고 엄마, 아빠에게 카톡을 보내는 내 이야기도.
*오픈리 게이 - 자신의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성소수자를 가리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