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하나로 똑 떨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제 보니 네가 나가 사는 거였어.”
김치를 싸주던 엄마가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그걸 오 년 만에 깨닫다니. 오 년 전, 나는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와 살기 위해 엄마 집에서 나왔다. 독립은 절대 안 된다고, 너 없이는 외로워서 못 산다고 우기는 엄마가 눈에 밟혔지만, 뽀뽀가 너무 하고 싶었다. 당시 난 삼십 년 만에 여자와 처음 연애를 시작했다. 그전까지 이성 교제만 해본 나는 몰랐다.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질 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 카페에 앉아 데이트를 할 때 뽀뽀하고 포옹하고 옆에 앉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지를. 그녀와 난 뽀뽀를 위해 연애 반년 만에 동거를 결행했다.
엄마한테는 일하는 단체에 잘 공간이 생겼다고, 피곤한 날은 자고 가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본격적으로 이사하지 않고 조금씩 필요한 짐만 가져다 쓰며 야금야금 독립했다. 시간이 흐르며 점점 엄마 집에 입을 옷이나 읽을 책이 없어 불편한 일이 늘었다. 그렇게 엄마가 눈치를 채지 못할 만큼 조금씩 생활의 중심을 서울로 옮겼다. “엄마, 나 오늘 자고 가”라는 보고가 “엄마, 나 오늘 집에 가”라는 공지로 바뀌었다. 올 초 더 먼 곳으로 이사하며 발길이 뜸해지자 엄마는 깨달은 것이다. 내가 집을 나갔다는 것을.
오 년 만에 찾아온 엄마의 자각이 반가웠다. 거짓말은 지독히 피곤하다. 나는 모든 걸 엄마한테 솔직하게 말하기로 결심했다. 동거인이 내 애인이라는 사실만 쏙 빼놓고. “응, 나 친구랑 같이 살아. 월세도 아끼고 좋잖아.” 그러자 엄마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집에는 우리 둘 뿐인데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묻는다. “남자야, 여자야?” 이런 질문에는 타이밍이 생명. 조금의 지체도 없이 나는 답했다. “에이, 엄마도. 여자지, 당연히.” 안심하라고 한 말인데 진짜 안심하는 엄마의 표정을 보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엄마, 그렇게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여자랑 산다고 좋아하면 어떡해.
은근히 엄마가 눈치채고 있는 건 아닐까, 기대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커밍아웃에 실패한 날이 떠올랐다. “엄마, 내가 레즈비언이면 어떨 거 같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는 호적에서 파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날부터 엄마가 내게 “사랑한다”라고 말하면 괜히 심술이 났다.
게임으로 치면 부모님한테 하는 커밍아웃은 끝판왕인데 나는 준비도 전략도 없었다. 그만큼 주변에 성공사례도 적다. 한 친구는 분기에 한 번꼴로 커밍아웃을 반복한다. 그의 엄마는 그때마다 처음 듣는 사람처럼 “네가 TV에서 말하는 동성애자라고?” 되묻는다. 한국어 자판에 아랍어를 입력할 수 없듯 이성애 나라에 사는 엄마에게 게이 아들이란 입력 불가한 낯선 나라의 언어다. 그런데도 친구는 굴하지 않는다. 퀴어축제에 간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아무렇지 않게 애인을 소개하고, 게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꺼낸다. “너도 대단하다. 엄마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모르고자 하는데도 멈추질 않으니.” 내가 타박해도 친구는 쿨하다. “그건 엄마 몫이지.”
친구의 엄마는 내 상식을 뒤집었다. 이전까지 내가 상상했던 커밍아웃의 반응은 받아들임 아니면 극렬한 부정이었다. 하지만 친구의 엄마는 퀴어축제에 갔다고 펄펄 뛰다가도 금세 마주앉아 웃으며 밥을 먹고, 네 애인이 남자였냐고 화들짝 놀라다가도 같이 먹으라고 반찬을 싸준다. 그 얘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세상에는 하나로 똑 떨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구나.
그럴 듯한 선언을 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내 식대로 커밍아웃을 이어가고 있다. 애인과 헤어짐이 아쉬워 정류장에서 긴 포옹을 할 때, 카페에 나란히 앉아 뽀뽀할 때, 커플 운동화를 신고 길을 나설 때 나는 더 이상 나를 숨기지 않는다. 그렇게 언젠가 엄마가 눈치 챌 만큼 티 나게, 이 이성애 사회에서 야금야금 독립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