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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Oct 12. 2023

나를 바꾸려는 남자친구

여자 만들기 프로젝트

승호는 삼수를 한 후배였다. 술자리에서 신입생인 그가 선배들과 반말하는 모습을 본 나는 말했다. “선배들한테 반말하지 말죠.” 한두 살 많다는 이유로 으스대며 선후배 기강을 흔드는 꼴이 보기 싫었다. “선배들이 먼저 놓으라는데 어떡합니까.” 승호는 바로 반발했다. 그날 그와 나는 주변에서 말릴 때까지 다퉜고, 과에는 우리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퍼졌다. 내 동기들은 두 살 많은 그를 “오빠”라고 불렀지만, 오기가 발동한 나는 꼬박꼬박 “승호 후배님”이라고 불렀다.


그에게 전화가 온 건 여름방학이었다. “선배님, 우리 한잔하죠.” 술자리에 나가니 그가 좁은 과에서 불편하니 이제 잘 지내보자고 했다. 마지못해 알았다고 했지만, 그에 대한 적대심이 여전히 불타던 난 지지 않으려고 소주를 세 병이나 마셨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드문드문 엉엉 울던 기억만 선명했다. 승호 말로는 내가 울면서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말했다고 한다. “승호 후배는 몰라요.”


뭘 모른다는 걸까. 그 문장의 목적어를 나도, 승호도 몰랐다. 문제는 그 말에 승호가 꽂힌 것이다. 그날 이후 매일 전화해 자기가 뭘 모르냐고 물었다. 나도 알 수가 없었다. 문제는 그 말도 안 되는 술주정에 승호가 나에게 반한 것이다. 그는 얼마 뒤 내게 고백했다. 당시 내 생각에 CC(캠퍼스 커플)란 자고로, 치마 입고 화장하며 잘 꾸미는 여자애들이 하는 것이었다. 나같이 짧은 머리에 맨날 똑같은 나이키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어서 ‘단벌 신사’라는 별명을 가진 애한테는 어울리지 않았다. 여름에 아디다스 반바지를 입으면 ‘초등학교 5학년 축구부 남자아이’ 같다고 놀림받는 머슴아 같은 내가 대체 왜 좋다는 건지. 결정적으로 나에게는 삐쩍 마른 180cm의 그가 별 매력이 없었다.


거절 후 승호는 소문을 낼 작정인지, 복도에서 마주치면 얼굴이 새빨개져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오던 길을 돌아 재빨리 도망갔다. 친구들 입에서 절로 “야, 쟤 너 좋아하냐?”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조용히 타이르려고 그를 학교 앞 순댓국집으로 불렀다. 본분을 잊고 또 술을 많이 마신 난 의자에 앉은 채로 뒤로 넘어졌다. 다신 오지 말라며 순댓국집 이모가 우릴 쫓아냈다. 가게를 나와 어딘가에 쪼그려 앉았는데, 술을 마셔서인지 나를 걱정하는 그의 눈빛이 진실되어 보여서인지, 그가 잘 생겨 보였다. 그렇게 이십 대의 첫 키스를 했다.


“너도 네 친구들처럼 치마 좀 입어 봐.” 사귄 지 얼마 뒤부터 그는 자꾸 내 친구들과 옷차림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오늘 미선이 입은 바바리코트 예쁘더라, 봤어?” 뒤에는 나도 그런 옷을 사 입으라는 조언이 따랐다. 정작 자기는 맨날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으면서. 그는 내가 초등학교 축구부 남자애 같은 게 싫다며, 대학에 왔으니 너도 꾸며 보라고 설득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물었다. 이럴 거면 치마 입는 애를 만나지 왜 나를 만났냐고. 그의 답이 더 기가 찼다. “너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야.” 그는 “진화가 덜 됐을 뿐 너도 꾸미면 예쁠 거”라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다.


문제는 치마 입는 걸 내가 소름 끼치게 싫어한다는 사실이었다. 중고등학교 내내 교복 치마를 입는 일도 곤욕이었다. 엄마가 가끔 사 오는 레이스 달린 블라우스도, 꽃무늬 치마도 한사코 거부했다. 내 눈길이 갔던 건 늘 남성복이었다. 단정한 카라티와 베이지색 면바지, 또는 스포티한 반소매 티와 운동화 그런 것들이 좋았다. 내가 설득에 넘어가지 않자 그는 생일 선물로 치마를 사 왔다. 당시 유행하던 디키즈 멜빵 청치마였다. 이걸 입으면 그다음은 더 ‘여성스러운’ 치마가 기다릴 게 뻔했지만, 난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 이깟 치마가 뭐라고 매일 싸우나 싶어 눈 딱 감고 치마를 입고 학교에 갔다. 그날 과 후배들한테 종일 사진을 찍혔다. 생일날 원치 않는 옷을 입고 구경당하는 기분이 싫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를 데리러 온 싱글벙글 웃는 그의 얼굴을 뭉개버리고 싶었다.


한 번의 승리로 만족하지 못한 그는 이번에는 속옷 가게에 나를 끌고 갔다. 종업원이 친절한 얼굴로 다가와 어떤 스타일을 찾냐고 물었다. 그가 신이 나서 레이스가 잔뜩 달린 속옷을 가리켰다. “저런 건 어때?” 내가 화가 나 가게 밖으로 나오자 따라 나온 그는 이게 다 여자가 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어이가 없었다. “그럼 이미 완성된 여자를 만나.”라고 말하고 그에게서 도망쳐 집으로 왔다. 혼자 남을 때면 화가 나면서도 그가 아니라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친구들이 스무 살이 되며 운동화가 아닌 구두를 신고, 청바지가 아닌 원피스를 입고, 화장할 때마다 나는 긴장됐다. 모두가 거치는 과정에서 승호의 말대로 나만 도태된 것만 같았다.


승호의 친구들이 왜 그렇게 남자 같은 애랑 만나냐고 뭐라고 하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승호의 친구들을 마주칠 때마다 그들이 마치 내 속옷까지 꿰뚫는 듯, 수치스러웠다. 승호는 다신 그러지 않겠다며 약속했다. 그는 한 달 정도 약속을 지켰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던 티셔츠들이, 멋지다고 생각했던 운동화가 더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승호와는 영화를 보러 가던 길, 기억나지 않는 사소한 다툼 끝에 헤어졌다. 일 년 반만이었다. 승호와 헤어지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난 짧았던 머리를 가슴까지 길렀다. 스포츠 브랜드의 옷들은 다 버리고 적당히 중성적인 세미 정장을 찾아 입었다. 머리 기른 뒤 생애 처음으로 소개팅 제안도 받았다.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도 더는 놀라는 사람이 없었다. 내 옷차림에 훈수를 두는 사람도 줄었다. 그런 생활이 편하면서도 화가 났다. 사람들은 왜 내가 나대로 사는 걸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걸까. 나는 여자 애인을 사귀고,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고야 다시 머리를 잘랐다. “여자 분장”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사실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 그 대가로 나를 숨기며 사는 고통이 얼마나 컸던 것인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여자친구를 만나고서야 깨달았다.


승호는 내게 “왜 치마를 입기 싫으냐”라고 자주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궁금했다. 내가 치마를 입고 싶어 했다면 그 이유를 이토록 추궁했을까. 나는 치마를 입은 내가 나답지 않다고 느낀다. 누구나 입고 싶지 않은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 서는 건 곤욕이다. 옷은 나를 표현하고, 나를 드러내니까. 승호와 헤어지고 17년이 지난 지금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그의 ‘여자 만들기’ 프로젝트가 끝내 나의 거부로 실패했다는 거다. 돌아보면 그에게 나는 그라는 남성을 만나 여성으로 거듭나야 하는 원석에 불과했다. 하지만 거듭나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성별 고정관념에 갇힌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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