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하는 일상
허리가 아파 여자친구와 요가를 시작했다. 시작은 원데이 클래스였다. ‘생각보다 쉬운데?’ 하는 마음에 당장 석 달치 수강료를 지불했다. 무엇이든 뭘 모를 때가 가장 쉬웠다. 내가 수월하게 했던 동작 모두 자세를 바르게 하면 팔,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힘든 동작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조차 켜지 않은 지 어언 십 년. 종일 앉아 모니터만 보는 직장인인 내게 유연성이나 근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수시로 하는 다운 독(개가 기지개를 켜는 자세)만 해도 다리 뒤쪽이 심하게 당겨 눈물이 찔끔 났다.
요가 선생님은 말했다. 요가하면 옆에 누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집에 갈 때가 많다고.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라나. 나 역시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게 남몰래 남하고 경쟁하는 나만의 싸움이라서 그렇지. 나와 비슷한 시기에 등록한 수강생이 내가 안 되는 자세를 하면 집에 와서 그 자세를 열심히 연습했다. 뒤처진다는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집에서 유튜브를 보며 아침, 저녁으로 요가 연습을 했다. 요가 학원에 가서 잘하려고 집에서 요가 연습을 하다니, 뭐 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몸은 정직해서 조금씩 되는 자세들이 늘어갔다.
선생님은 또 말했다. “요가는 열심히 하는 거 아니에요. 힘들면 블럭을 받히고 하셔도 돼요. 할 수 있을 만큼만 적당히 하세요.” 나는 적당히 하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해도 늘까 말까인데, 적당히 해서 어느 세월에 실력이 늘까. 옆 사람이 팔을 쭉 뻗어 발 끝에 손이 닿으면, 나는 더 엎드려 바닥까지 손이 닿아야 직성이 풀렸다. 블럭을 대고 하는 건 의지가 나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팔이 닿지 않는데도 끙끙대며 블럭 없이 요가를 했다. 몸 여기저기가 당길 때면 무엇을 위한 요가인가 싶었지만, 안 되던 자세가 될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어려웠던 자세가 될 때는 요가를 다 정복한 듯 기뻤고, 조금이라도 안 되면 ‘이 몸으로 뭘 하나’ 하며 치솟던 의욕이 바닥 치길 반복했다.
하루는 수업에 5분 늦게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람들이 블럭을 두 개씩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선생님이 블럭을 하나를 내게 넘기며 말했다. “봄밤 씨는 하나면 돼요.” 그가 “블럭을 날개뼈 뒤에 넣고 팔을 위로 뻗어 눕습니다.”라고 할 때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다. “이 동작이 수월하면, 블럭을 하나 더 넣어서 2단으로 만드세요.” ‘네? 뭐라고요?’ 내게는 하나 더 쌓을 블럭이 없었다. 그가 하나밖에 주지 않았으니까. 네가 2단까지 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건가? 나는 오기가 나서 블럭을 세로로 세워 날개뼈 뒤에 세웠다.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었는데 땅에 닿지 않았다. 기를 쓰고 날개뼈를 모았다. 가슴 앞이 끊어질 것만 같이 당기는데도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였다. 처음 보는 수강생에게 그가 말했다. “요가해 보셨어요? 유연하시네요?” 수강생이 말했다. “아니요, 처음 해봐요.” 둘의 대화에 왜 내가 비참해지는 걸까. 그날 담이 든 날개뼈가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 뻐근하다.
“자, 등을 바닥에 대고 눕고, 두 팔을 양옆으로 넓게 벌릴게요. 두 무릎을 모아 한쪽으로 넘기고, 머리는 다리와 반대 방향으로 넘깁니다.” 그날은 ‘비틀기 자세’를 했다. 요가원에서는 처음 하는 자세였지만, 나는 매일 아침 “강하나의 기상 스트레칭” 영상을 보며 따라 하던 자세였다. 내 두 무릎이 옆으로 넘어가도 어깨가 뜨지 않고 바르게 붙어있자, 선생님이 놀라며 말했다. “어? 이 자세는 잘 되네요.” ‘네, 잘 되는데 거기에 왜 ‘이 자세는’이 붙을까요?’ 따지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데 그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마다 몸의 구조에 따라서 되는 자세가 있고 안 되는 자세가 있어요. 잘 살펴보면서 하세요.” ‘아니요, 저 이거 석 달 동안 아침마다 연습해서 되는 거라고요. 제 몸이 원래 그런 게 아니라 노력이라고 노력.’ 벌떡 일어나서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담았다. 이래서 요가가 수행이라는 건가. 요가원을 나온 나는 애인에게 말했다. “선생님 안 되겠어. 내가 더 열심히 해서 본때를 보여 주겠어.” 애인은 말했다. “무슨 선생님한테 본때를 보여줘. 본때를 보여줘서 뭐 할 건데?”
그렇게 넉 달 차, 선생님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도 전에 정체기가 찾아왔다. 처음 한두 달은 달라지는 모습이 확연히 보였는데, 갈수록 변화는 굼떴다. 심지어 되던 동작이 안 되는 날도 있었다. 종일 의자에 앉아서 컴퓨터만 본 날에는 돌아가던 목도 돌아가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더 글로리>를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밤새 봤다. 그 뒤로는 고개를 뒤로 젖힐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했다. 석 달의 노력이 하룻밤 드라마 시청으로 무너진다고? 목에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요가원 가서 더, 더 못할 내가 떠올라 속이 상했다. 시험 보기 싫어 학교 가기 싫은 학생처럼 요가원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1년 치를 시원하게 결제한 후였다. 뭐든 하기만 하면 더 나아질 거라고,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의 곡선을 그리는 건 당연하다고 믿던 내 신념에 금이 갔다. 운동을 할수록 더 나빠지는 몸이 세상에는 존재했는데, 그 몸이 내 몸이었다.
내가 끙끙대며 요가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애인이 어느 날 물었다. “자기는 요가를 뭐라고 생각해?”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솔직히 난 요가가 유연함인 거 같아. 정답이 아닌 건 알지만 지금 나한테는 그래.” 애인은 한숨 쉬며 말했다. “자기는 동작의 완성을 요가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 그래서 지금 자기가 하는 건 요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니까 창피한 거 아닐까? 동작의 완성이 아니라 요가하는 것 자체가 요가지. 왜 있잖아. ‘걸어서 세계 속으로’처럼 이미 세계에 있는데 세계를 찾아가는 것처럼 이미 요가를 하고 있는데 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반박 불가. 그럼 난 ‘걸어서 요가 속으로’를 하고 있는 걸까? 매사 현존보다는 미래에 대한 계획, 준비, 구상에 늘 마음이 가 있는 내가 요가를 한다고 쉽게 달라질 리 없다. 애인의 말대로 지금 여기 요가를 하는 나를 느껴본다. 있는 그대로. 요가를 더 잘하고 싶은 나를. 내일은 오늘보다 더, 오늘은 어제보다 더, 나아질 나를 잔뜩 기대하는 나를. 걸어서 요가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