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한 욕망의 구체화가 사람을 바꾸는 과정
어색함에 지지 않았던 나의 이야기를 더 풀어보려 한다. 나머지 근거 3가지는 정말 부모님의 사랑덕에 가지게 된 것일까.
1.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는다.
2. 나라는 존재를 당당히 여긴다.
3. 실수나 잘못을 합리화가 아니라 인정을 한다.
4. 뒤에서 남을 까내리지 않고, 남을 바라보는 시선이 선입견 없이 순수하다.
5. 남의 행동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2, 3, 4의 나‘는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보인다.
이러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을 한 마디로 말하면, 내가 바뀌고 싶은 마음이 정말 절실해서이다. 예를 들어, 시험 점수가 낮다면 왜 이렇게 된 건지 시험지를 분석한다. 평소 공부 방법과 시험에서 묻는 것의 괴리를 알게 되면 자연스레 시험 점수가 높게 나올 공부 방법을 탐구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하지만 이런 행동력도 결국 내가 주체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시험을 치는 도중에도 내가 판단하게 된다.
아, 내가 공부한 거랑 좀 다른 게 많이 나왔는데 시험 끝나고 다시 봐야겠다.
이런 생각이 가능한 이유는 내 욕망의 구체화 덕분이다. 쉽게 말하자면, 학교 공부는 대학교 때문이 가장 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대학의 이름은 취업과 연관이 높다고 생각한다. 나는 미래에 안정적인 디자인계열 직장을 다니며 지금과 같이 그림 활동, 굿즈 판매도 더 활발히 하고 싶다. 그런 미래의 나를 상상하면 너무 행복하다. 그래서 절실하게 되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면 좋고 아님 말고가 아니라, 공부가 내가 원하는 미래를 더 쉽게 만들어나가는 수단이라 생각을 하면 당연히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차피 학교에 있어야 한다면, 공부는 오롯이 내가 열심히 해서 이뤄낸 성과기에 나를 인정하는 근거로도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데 어떻게 공부를 안 할 수 있겠는가.
고등학교 때 주변 친구들에게 내 인스타 계정을 알렸다.
내가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이런 글들을 쓰는 사람이라고. 예전에는 숨기려 했는데, 지금은 변했다. ’작가로서 글 쓰고 그림 그리는 나‘와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나’에서의 격차가 좁혀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공부에 관한 글을 많이 쓰기도 했고 친구들과 얘기하는 주제도 내 글의 주제와 비슷했다. 물론 내가 먼저 꺼낸 주제였지만. 그리고 결정적으로 바뀐 믿음 한 가지가 있다. 예전엔 내 글과 그림이 너무 진지하고 개인적인 불안에 관한 내용이 다수였기에 친구들이 내 게시물을 보면 나라는 사람을 너무 무겁게 볼 것 같았다. 불편하게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부터 나만의 깨달음을 전달하는 목적의 글을 많이 쓰다 보니, 내 주변에게 나의 깨달음을 공유하고 싶은 거다. 이제 내 글은 무거운 게 아니라, 친구들이 깨닫고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인 거다.
또한 내 글은 나라는 사람을 알리는 수단이자, 내 매력의 근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요즘 난 내 글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 주변에서 듣기 어려운, 진리와 같은 말을 해줄 유일한 사람으로 정체성을 새기자 나를 주변에게 알리는 행동을 하게 됐다. 그러자 주변은 나를 ’뭔가 다른데 성실하기도 한, 뭘 하든 잘할 것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실제로 들은 말이다. 처음에는 그냥 하는 말인가 싶었는데, 말에 진심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친구에게선 처음 들은 말이다. 그래서 믿었고, 내가 잘 살고 있구나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는 어떻게 해야 좋게 보일까 궁리를 했었고, 결국 듣지 못했던 말이다. 그런데 내가 그냥 나를 드러내고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니까, 내 모습을 진심으로 드러내니 그제야 그때의 내가 원했던 말을 듣게 됐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펼치기만 하면 되는데, 왜 계속 나를 숨기고 맞지도 않는 것을 펼치려 했던 걸까. 그때의 나는 ‘진짜 나’를 부정하는 마음이 컸다. 쉼 없이 자책했고 나 스스로 나를 멋대로 재단하면서 이상적이고 완벽한 허상을 좇기 바빴다. 답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지 모른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은 그만하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공부에서의 고민은 삶에서의 고민과 맞물린다.
공부 고민을 마주하고 어떻게 해볼지 연구하고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써보는 것에 익숙해지면, 나중에 다른 고민 또한 쉽게 마주할 것이다. 이미 공부 말고 관계나 그림에서도 많은 해결을 반복해 왔다. 지금의 내 고민을 무시하지 않고 해결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며 내 성격 특성에 맞는 해결 방법을 아는 것은, 나중에 있을 내 고민 또한 훨씬 빠르게 알아채고 조금 더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미 내가 나를 잘 알기 때문에 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나에 대해 생각하기 바쁜 하루들을 보내니, 남의 행동 하나하나에 연연할 시간이 없어진다. 내가 중요한 게 명확해지니 사소한 것들에 신경 쓸 시간조차 들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나를 알아가면서 몰랐던 나의 행동 특성과 그 특성이 내게 주는 힘듦을 정확히 알아냈다. 그러니 점점 그 틀이 허물어졌고 내가 원하는 것을 더욱 빠르게, 만족스럽게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장담하건대 나를 당당히 여기고, 잘못을 인정하고 나아갈 방향성이 대해 고민하고, 선입견 없는 시선을 가진 사람이 된 것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건 ’나‘다.
내가 미래에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어떻게 하루를 보내고 싶은지를 생각해 보고 구체화하니,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수단을 힘껏 사용하게 된다. 미래의 모습에 절실하니까. 그리고 이리 절실하게 된 건 나 스스로가 절실하게 만든 거다. 끊임없이 주변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표현하며 더욱 미래의 나를 상상했고 되고 싶단 마음을 뚜렷이 했으니. 한 마디로는 욕망의 구체화가 되겠다. 생각하지 않으면 절대 내재된 욕망은 구체화될 수 없다. 이렇듯, 나는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멋진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또한 부모님의 사랑으로 내가 멋진 사람이 된 것이라면 또 나는 남의 눈치를 본 것이 아닌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부모님의 사랑이 더 중요한 거니까. 결국 남의 좋은 평가로 나를 판단하겠단 말 아니겠는가.
부모님께 사랑받고 있지 않아서 내가 이렇게 멋지지 못한 사람이다라는 가정은,
부모님께 사랑받기만 하면 나도 저렇게 되겠지. 하지만 나는 저렇게 될 수 없어. 왜냐, 부모님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으시니까.
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 없이는 정말 ‘멋진 나’가 될 수 없는 걸까.
내 생각에 그 친구는 부모님의 사랑 없이도 충분히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 진심이다. 하지만 그저 자기 스스로가 부모님의 사랑 없이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정말 될 수 없는 게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가 생각한 대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