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 양귀자
얼마 전 친구가 집에 놀러 와서 같이 족발을 시켜 먹었다. 족발을 다 먹고 치우는 데 음식물 쓰레기를 어떻게 하냐고 묻길래 양이 적으니 그냥 변기에 내려버리자고 했다. 음식물을 다 치운 친구가 나머지 쓰레기를 모두 일반 쓰레기에 쑤셔 넣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저번 주에 들은 환경 강의를 들먹이며 분리수거를 하라고 잔소리 했다. 친구는, "야 웃긴다. 음식물 쓰레기는 변기에 버리라는 놈이 갑자기 환경 생각하는 척하냐?"라고 일침을 날렸다. 나의 모순이 까발려지니 할 말이 없었다. 이제 와서 내 모든 삶을 친환경적으로 바꿀 자신은 없는데, 그럼 분리수거를 하지 말아야 하나...?
내 가까운 지인 중에 삶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추구하며 사는 친구가 있다. 종교인은 아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탐구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한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적인 구도자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그 당시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끝까지 투쟁하며 삶을 놓지 않는 그 형의 구도자적인 모습이 참 좋아서 늘 곁에 함께 했고 많은 것을 배웠다. 형과는 특히 독서로 강하게 이어져 있었는데, 일주일에 한 권씩 같은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함께 읽은 책이 쌓여갈수록 나는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의 모습과 형이 쫓는 무언가가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생명체로서의 강력한 본성인 '나만 생각하는 마음'을 다스리고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존재. 모든 존재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 욕심보다 사랑을 택하는 자. 형은 예수가 되고 싶었다.
형이 원하는 삶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다시 형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형의 삶에는 모순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시에 부동산 투자에 열중하고 있었고, 자본주의를 신봉하며 푹 젖어 든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개인의 욕심을 자유케 하며 탄생한 경제사상이다. 내가 추가로 얻는 이득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서 당겨 가져오는 것이며, 내가 더 얻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미래의 우리가 생산할 양이 늘게 되어 오히려 욕심은 경제를 발전시키는 좋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허나 이는 '반드시 미래의 생산량이 늘어날 것이다.'라는 전제가 참이어야지만 옳다. 만약 전제가 참이 아니라면, 내가 추가로 얻는 이득은 반드시 누군가의 주머니를 약탈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부동산으로 돈을 벌겠다는 형의 현재 행동은 예수 같은 삶을 살고자 했던 또 다른 형의 모습과 명백하게 모순된다. 형은 이 모순된 삶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했다.
"사랑하며 사는 삶이 옳다는 것은 알지만, 나는 내 가족들에게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인간 김민수에게는 더 크더라. 사람은 모순을 견디며 사는 존재라고 생각해. 모순을 견디는 고통도 만만치 않더라. 가족을 위해 한 번 견디면서 살아보려고."
사람은 동식물과 다르게 세상을 위에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눈을 통해 내가 처한 상황,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예상할 수 있다. 곧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자신의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단한 인식 능력과 달리 사람의 힘은 무력하기 그지없다. 세상은 온갖 변수로 가득 찬 바다와 같고 우리는 그곳을 표류하는 로빈슨 크루소다. 내가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능력은 있지만, 파도의 흐름을 바꿀 힘이 우리에게는 없다. 이러한 인지와 힘의 불균형에서 모순이 생긴다. 이렇게 살아야 옳다는 것은 알지만, 때로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세상 앞에 무력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모순을 견디는 삶은 투쟁이다. 거친 파도 속에서 어떻게서든 나의 길을 가보려는 노력이다. 그러니 우리를 조금은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이리저리 휘둘리지만 내가 옳다고 믿는 쪽으로 열심히 노 젖기를 멈추지 않는 우리는 참 기특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음식물을 변기에 버리지만, 분리수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