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시골 책방입니다.
깊은 맛은 반대다. 먹고 나서 전혀 죄스럽지 않다. 빈접시가 부끄러울 리도 없다. 양념장이 없으면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밍밍한 맛이다.
‘얕은 맛'이 혀가 느끼는 맛이라면 ‘깊은 맛'은 위가 느끼는 맛이다.
…
얕은 맛은 어린아이들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면 깊은 맛은 나이 들어야 제대로 아는 맛이다.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中
나이 들어서야 제대로 알게 된 맛이 있다.
고사리, 시래기, 가지, 호박 등을 말렸다가 이듬해 정월 보름날에 먹는 묵나물과 오곡밥이 그랬고, 콩을 갈아 말아먹는 콩국수가 그랬다. 그리고 또 하나 배추 전이었다.
부모님의 고향이 경상도 예천이라 명절이나 제삿날이면 으레 배추 전을 먹었다. 경상도 사투리로 ‘전’을 ‘적’이라 했다. 어릴 적 나는 고기나 생선, 해물도 없이 허연 배춧잎을 부쳐놓은 이 전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목구멍을 넘어 깊숙이 스며드는 배추 전의 맛을 알게 되었다.
결혼해서 명절이 되면, 음식 솜씨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나는 간단하면서도 따로 애써 맛을 내지 않아도 되는 배추 전을 부쳤다. 서울이 고향인 시댁 식구들도 늘 해 먹던 녹두전 보다도 바로 부쳐 낸 배추 전을 더 좋아했다.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는 안동 김 씨 가문 여인들의 음식과 삶이 담긴 이야기다. 이 책은 청도의 ‘시골책방 봄날’ 책방지기가 추천해 주었다. 김서령이라는 작가의 이름도 처음이었고, 제목도 선뜻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읽기 시작하자 문장마다 이어지는 은유와 묘사가 어릴 적 기억을 은은한 향수처럼 온몸에 뿌려 주었다.
‘정지’ ‘~실아’의 단어와 ‘~더.’ ‘~껴’로 끝나는 문장들은 외갓집 친척들이 하는 말 같아서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귀로 읽혔다. 마치 오디오북을 듣는 듯했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가 경이로워 소리 내어 다시 읽고, 밑줄을 긋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오랫동안 아팠던 엄마가 해 주던 몇 안 되는 음식이 떠올라 훌쩍이기도 했다. 책을 읽다 멈추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책 뒷면의 추천사 중 ‘좋은 문장이 고플 땐 김서령을 읽곤 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맞다.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책 속의 언어의 유희는 찬란하면서도 따듯했다. 짧은 어휘로 차마 표현하지 못하는 가슴속 묵직함과 뭉클함이 있었다.
외롭고 스산한 11월, ‘사유의 밤’ 북클럽 도서로 이 책을 선택했다. 그리고 우리는 배추 전 파티를 열었다.
모두님이 커다란 배추 두 통을 들고 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배춧잎을 씻어 밀가루를 곱게 개어 부쳤다. 청양고추를 다져 넣고 참기름을 둘러 양념장도 만들었다. 배추 전을 부치는 내 모습이 어설펐는지 백구두님이 프라이팬을 잡았다. 익숙한 손놀림에 배추전이 척척 부쳐졌다. 배추 전을 처음 먹는 이도, 먹어 보았던 이도 그 깊은 맛에 한 마음이 되었다. 백구두님이 어릴 적 추억의 음식이라며 직접 만들어 온 호박범벅까지 곁들여 먹으며, 우리는 아름다운 문장을, 그리움의 음식, 그리고 각자의 삶과 관계의 깊은 맛에 대해 나누었다.
가끔 책방 뒤 중정에서 배추 전을 부쳤다. 비가 오는 날 “전이나 부쳐 먹자”라고 연락하면 막걸리 두 병을 사 들고 오는 이웃이 생겼다. 도시의 아파트에서 살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늘 얻어먹기만 하던 마을 어른들께 음식 솜씨가 없어도 할 수 있는 배추 전을 해 드렸다. 마을의 큰 살림을 하는 이장님 입맛에는 어떨까 싶어 전을 떼어 양념장에 찍어 입으로 가져가는 젓가락을 경로를 나는 가만히 쫓았다. 배추의 달큼한 맛과 부드러운 식감이 좋다고 하셨다.
그렇게 조금씩 속이 썩은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먹는 것이 배추적이었다. 날것일 땐 달았던 배추도 밀가루를 묻혀 구워놓으면 밍밍하고 싱거워졌다. 생속을 가진 사람은 배추적의 맛을 몰랐다. 배추적을 입에 넣어 “에이 뭔 맛이 이래? 싱겁고 물맛만 나네!” 하면 자기 속에 생속이라는 고백이었다.
그 맑고 히수무레하고 수수하고 슴슴하고 조용하고 의젓하고 살뜰한 것을 씹는다. 그리고 꿀꺽 삼킨다.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中
귀한 상에는 올리지도 않던 허드레 음식 배추적은 조용하고 의젓하고 살뜰하게 그 삶을 견뎌온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였다.
배추 전을 다시 부쳐 먹었다.
달고 짜고, 맵고 신 자극적이고 강렬한
얕은 맛이 아니라
히수무레하고 수수하고 슴슴한 맛.
씹을수록 조용히 퍼지는 그 맛이
시골 책방을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