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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t Cracker Aug 05. 2023

세상에 '그럴 리 없는 사람'은 없다

[한국일보 젠더살롱] 

사건이 있은 직후,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참을 걸었다. 같은 미래를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어른들이 툭 던진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이 사건을 볼때마다 심장을 철렁하게 했다. 그 사이 3년이 지났다. 왜 이제야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됐는가, 왜 지금에서야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는가. 글을 쓰면서 무엇이 그토록 주저하게 했는가. 다큐를 만들고 보는 이들이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위계는 이토록 생생하게 곳곳에 만연해 있다. 이제 좋은 어른이 없다고 탓할 수만은 없어서 그럼 좋은 사람은 무엇일까 고민하며 썼다. 부디 내일 있을 간담회도 무사히 잘 진행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올해는 나이를 다채롭게 먹었다.


연초에는 떡국과 함께 한 살을 먹었고 6월부터는 만 나이로 계산한다기에 잽싸게 두 살을 뺐다가 몇 달 뒤 생일이 지나면 또 한 살을 먹는다. 한 해 사이에 이렇게 부지런히 나이 먹은 탓에 나이 듦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나이가 ‘든다’니, 또 나이를 ‘먹는다’니, 실로 나에게 그만큼 들어찬 게 있었던가? 물론 나이야 노력하지 않아도 쌓인다지만, 그래도 속 빈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아 매해 스스로를 점검한다. 나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괜찮은 어른이 되고 있나? 이제 고작 서른 즈음일 뿐인데도 도통 그 무게가 가볍지 않다.

...


성폭력 예방교육 전문강사로 활동하며 수많은 성폭력 사안을 접하고 성폭력 가해자 재범방지교육을 다니며 배웠다. 세상에 그럴 리 없는 일들은 없고, 그런 사람이 아닌 줄 알았던 사람도 그럴 수 있다. 게다가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미투 운동이 남긴 교훈이 무엇이었나. 성폭력은 권력의 문제이고 그 문제에 성역은 없다는 잔인한 현실이었다. 우리가 진정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더 성숙하게 나이 들어가는 존재라면, 눈감고 귀 닫지 말고 책임과 미래를 마주해야 한다.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우리 사회가 더 안전해지기 위한 방법을 말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 실마리를 풀었어야 할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가해자는 사라졌지만 그것이 곧 회복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책임을 나눠 질 수 있다.

...


기어코 그 다큐를 봐야겠다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지지하던 박원순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약자 옆에 선 인권 변호사? 사회 변화를 이끄는 시민사회운동가? 혁신을 말하는 정치인? 어떤 쪽이든 당신이 박원순을 통해 꿈꾸었던 세상은 개인의 과오를 지우고 숭배하는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도리어 그의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한발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내가 박원순을 통해 지향했던 세상은 더 많은 남성이 함께 페미니즘을 접하고 실천하며 성평등을 실현하는 곳이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가득한 세상임에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말하기 주저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런 세상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걸었다. 결국 그의 잘못된 선택으로 그 기대는 무너져버렸지만, 그렇다고 내가 지향했던 세상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다. 그의 잘못과 한계를 인정하고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어떻게든 책임을 나눠서 지며 미래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한, 세상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 기사 원문링크 :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3080310410005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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