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청소년 성(평등)교육 길찾기 2 참여후기

by Nut Crac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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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17일, 아하센터에서 개최한 <남자 청소년 성(평등)교육 길찾기 2> 포럼에 현장 사례 발표로 참여했다. 포럼 자체가 익숙하지 않고 현장 경험도 소박한지라 과분하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생각하던 주제고 조금이나마 고민을 모아야지 싶어 열심히 발제문을 작성하고 참여했다. 생각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예상 인원을 훌쩍 넘어 홍보를 시작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신청이 마감 됐다. 왜 이렇게까지 관심이 뜨거웠을까?


가장 큰 이유는 결국 남자 청소년이 뜨거운 감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단톡방 성희롱, 여성혐오, 불법촬영과 웹하드카르텔 등 끊임없이 쏟아져나오는 끔찍한 이야기 사이에서 남자 청소년은 문제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핵심 고리 중 하나다. 동시에 교육현장에서 남자 청소년은 가장 어려운 교육 참여자다. 억울해하고 분노에 찬 남자 청소년을 마주하는 건 모든 교육자의 악몽이다.


이런 난해함을 잘 알기에, 수많은 우려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남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포럼을 기획하고 개최했을 것이다. 성별이분법을 강화하거나 발언권을 빼앗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겸허히 새기면서 고민을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포럼에서 나온 이야기를 되돌아 본다.


왜 굳이 ‘남자’ 청소년을 이야기하는가?


포럼이 진행되며, 남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분리 교육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차례 나왔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개인적으로 남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분리교육에 찬성하지 않는다. 교육 효과가 더 좋을 것인지도 의문이며 성별이분법을 강화하는 결과만 낳을게 뻔하다. 성교육 시간에 여성참여자를 대상으로 하는 혐오 피해를 예방하고 좀 더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는 장점을 고려하더라도 그러한 형태의 교육이 보호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남자’ 청소년을 따로 떼어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지 스스로도 계속 고민하고 있다. 그럼 해당 포럼은 왜 참여했으며, 발제문은 무엇을 의미할까? 왜 굳이 남자 청소년을 따로 이야기하는가? 그럼에도 이런 자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우리가 진공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발제문에도 썼듯, 청소년은(사실 모두가) 백지 상태에서 교육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정환경, 미디어, 또래문화 등으로 인해 이미 다양한 가치관과 이해,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고 이는 당연히 교육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김지혜 선생님의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특권 개념은 우리사회 권력구조를 성찰하지 않는다면 의도하지 않더라도 차별과 폭력이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는 남자 청소년이 성차별 관련 이슈에 무지할 수 있는 특권을 설명한다. 한편으로 나에게는 이러한 맥락과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남자 청소년의 억울함과 분노를 너무 손쉽게 ‘안티 페미니즘’으로 퉁쳤던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했다. 이들이 어떻게 남성성을 받아들이고 수행하는지, 이들이 표출하는 억울함과 분노 이면에 어떤 상황과 감정이 있는지. 활동가로서, 교육자로서, 이러한 현실을 대물림한 한 사람으로서 들여다보고 책임 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포럼은 남자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닌 강사는, 강의안은, 교실환경은, 교육체계는, 학교는, 마을은,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어떻게, 무엇을 해야하는지 이야기 나누는 자리였다. 당연히 두 시간은 충분치 않았고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답도 없는 이야기로 느껴졌을지 모른다. 그래도 열정을 쏟아 이런 자리를 기획하는 사람, 뜨거운 관심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 또한 이번 경험을 토대로 부족한 현장 경험과 갖가지 고민을 더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포럼의 교훈을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아닐까 싶다.


공동체 안의 모든 이와 갈등도 포함되는 역동적인 이야기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이들의 공동체. 여기에서는 이야기로 정의되는 인물과 그 이야기를 함께 써나가는 공동 저자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다. 만약 함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이야기의 공동저자라는 정체성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구성원과 '다른'이가 등장하더라도, 혹은 기존 구성원 안에서 누군가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더라도, 우리는 그 차이를 외면하는 대신, 차이라는 사건과 새로운 인물을 포함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다. 서사적 정체성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타인과의 함께함에 대해서 새로운 줄거리를 구성해나갈 수 있다.
_난치의 상상력 (안희제, 2020, 291)

차이는 특정 대상을 부각하고 강조하기 위함이 아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써 함께 이야기를 써나가기 위한 이해의 시작, 이해를 여는 문이 되어야 한다. 물론 아직 문이 맞기는 한지, 열 수 있는건지, 뿌연 안개 속에서 열심히 벽을 더듬는듯 하지만, 그래도 바쁘고 치열한 일상의 와중에 각자의 자리에서 그 문을 두드리고 들여다보며 다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나의 다음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해본다. 참 많이 배울 수 있는 자리였다. 자리를 마련해준 센터와 참여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이상 후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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