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를 조졌다

by Nut Cracker

강의를 조졌다.

2시간도 채 되지 않는 강의였는데, 식은땀이 나고 목이 다 갈라졌다. 강의 도중에도 몇 번이나 도망가고 싶었다. 혀가 꼬이고 동공이 흔들렸다. 강의가 끝나고 나서도 담당 선생님을 볼 면목이 없었다. 집 오는 길, 운전을 하며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몇 번이고 소리를 질렀다.

애초 쉽지 않은 교육인걸 모르지 않았다.
남자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성교육이었고 강의안도 아직 입에 익지 않았다.
아니, 이런 환경과 조건은 사실 다 변명이고 준비가 미흡했다. 이제 어느 정도 강의가 익숙하다는 오만에 빠져 긴장의 끈을 놓친 결과다. 후회하고 자책한들, 시간은 지나가버렸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건, 다음주에 다시 또 같은 교육대상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부끄러운 오늘을 꼭꼭 곱씹으며 복기하고 다음을 대비해야지.

먼저 앞단에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이야기나 시간이 필요하다.
진짜 이 교육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좀 더 심도 깊으면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도입을 제시해야 했다. 예컨대 사춘기를 경험한 나의 일화를 공유하면 어떨까? 준비되지 않은 채로 사춘기를 맞닥뜨려 당황한 경험, 상대에 대한 무지로 인해 상처를 주고 받았던 경험 등,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사례로 도입을 시작하면 훨씬 흥미롭고 친근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어서 성지식 퀴즈.
단순히 O/X로 전달하거나 개념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체계적이고 유기적인 정보 전달이 되어야 하는데, 전달할 내용은 많고, 대상자는 수준이 또 다 다르고, 시간은 없어서 너무 파편적으로 정보를 전달했다. 앞단에서, 성교육 필요에 대해 이야기 했다면, 이 부분에서는 참여자의 지식, 정보를 점검하고 혹 잘못된 정보나 모르고 있는 정보는 없는지 확인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오해, 잘못된 정보는 어디에서 어떻게 유통되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뒤에 성폭력 파트와 자연스럽게 연계될 수 있어야 한다.

좀 더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고, 강의 대상에 꼭 필요한 정보를 잘 정리해서 전달하자.
예컨대, 남자 중등 청소년에게 월경은 어떤 식으로 설명되어야 할까? 임신과정은? 성기의 해부학적 구조와 기능은? 무엇을 중심으로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예전에 내가 들었던 그 뻔하고 재미없는 성교육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데, 한편으로는 사춘기 청소년의 성발달에 대한 정보 역시 제공해야 한다. 이 정보가 대체 왜 필요한지, 충분한 설득력과 함께 용어와 개념을 설명하면서, 사회 통념과 관련한 이야기까지.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설명한다.

두 번째 시간은 일상의 성차별과 성폭력 파트였다.
차라리 이 부분이 훨씬 설득력 있고 와닿게 설명할 수 있었고 참여자도 더 흥미를 보였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반감도 느껴졌으나, 청소년이 공감할 수 있는 성차별 사례를 제시하니 곧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다만 폭력 상황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개입할 수 있음을 좀 더 확실하게 이야기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특히, 참여자 중 한명이, 폭력 상황에서 개입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이야기 했다. 참여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과 별개로, 이 목소리가 다른 참여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좀 더 명확하고 확실하게 해당 참여자의 이야기를 정정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신고는 ‘찐따’나 하는 거예요.”, “그렇게 행동하면 친구가 다 없어질걸요?” 이런 말에서 재빠르게 어떤 것이 ‘멋있다’고 생각 되는 행동인지, 이 참여자의 말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으며, 어떤 행동과 모습을 갈망하는지 캐치하고,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이 ‘좋은 친구 관계를 맺는 것’임을 이야기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원하는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더 나은 방식이 가능하며, 실제로 실천하는 케이스가 있음을 이야기했다면 해당 참여자 혹은 그 주변의 공감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교육 참여자를 존중하고, 강사의 권력을 고려한답시고 결국 논지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진정 중요한 것은 놓치고 말았다. 후회로 속이 쓰리다.

아무래도 일을 줄여야겠다.
불안으로, 괜한 욕심으로 이것저것 일을 받으면서 결국 제일 중요한 강의 준비 시간이, 여력이 줄어들고 말았다. 현실적인 변명을 하자면, 프리랜서의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활동을 위해 다양한 수입원이 필요했다. 좀 더 그럴싸한 변명을 하자면, 교육만으로 닿지 않는 곳에 필요한 활동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봤자 다 변명이고 풋내기 강사 주제에 아주 시건방졌다.
지금 내가 다시 곱씹어야 할 말은, ‘혼자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영화 저스티스리그의 홍보문구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리라, 해야된다 생각 말고 정말로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고 집중하자. 내일 모레쯤 끝날 수 있는 활동이 아니니까. 무리하지 말고 오래오래.

오늘을 기억하자.
공교롭게도 오늘은 5월 17일이고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5주기다.
많은 게 달라졌으나 또 여전히 너무 많은 게 그대로인 오늘을 기억해야지.
결국 기억하는 사람이 세상을 바꿀테니까 오늘을 두고두고 기억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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