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성평등 강의를 의뢰해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신식 학교라 건물도 좋고 급식도 맛있는데다가 학교에서 바다가 보인다. 이 정도면 고등학생 때로 돌아가 다시 학교를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법도 하건만, 딱히 그렇지는 않다. 그러기에 한국 고등학생은 너무 괴롭고 성인은 짜릿하니까. 그냥 딱 이 정도로 맛보기 하는 게 좋다.
이 학교가 진정 특별했던 건, 성평등 주제로 3교시에 달하는 수업을 할 수 있었다는 거다. 고등학교 1학년에게 이 만큼의 시간을 할애하는 곳이 또 어디 있을까. 같은 시간 동안, 다른 반에서는 장애 인권, 채식, 생태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강의를 의뢰해주신 선생님 덕분이다. 이런 선생님들이 계시기에 미래가 밝다.
선생님이 넘겨주신 바톤을 잘 이어받기 위해, 시간 내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최대한 다 담았다. 앞단에는 동기부여를 위한 소개를 담았다. 어쩌다 성평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그게 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지, 성평등이 그리는 세상의 모습은 어떠한지. 이어서 뿌리깊은 여성혐오적 역사를 짚으며, 그런 역경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이 오늘날 우리 근간을 이루는 권리 확산에 다양하게 기여해 왔음을 이야기 했다.
다음 장에서는 여전히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를 이야기했다.
성차별, 여성혐오는 과거 유산이 아니며, 현재 진행 중인 문제임을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청소년들이 관심 갖는 소재인 게임, 학교, 미디어 같은 것을 다룬다. 이 과정에 김지혜 선생님의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나온 ‘특권’과 ‘사회적 차별’에 대한 개념을 넣어 이게 비단 누군가의 악의 때문만이 아닌 우리사회의 좁아진 시야 때문으로 문제를 짚었다.
끝 부분에는, 페미니즘이 만들어내고 있는 긍정적인 변화를 보여줬다. 대표적으로 n번방 사건 가해자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고 처벌받을 수 있게끔 한 것, 불법촬영 시청 가해 처벌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이끈 것 등을 넣었다. 긍정적인 변화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니까.
제일 좋았던 건 질의응답 시간이었다.
거진 30분을 참여자와 소통하며 보낼 수 있었다. 최근 악플에 가까운 강의평가로 내상을 입기도 한 지라 두려움도 없지 않았으나 그래도 또 이런 시간이 언제 있겠나 싶어 과감히 시간을 썼다. 그리고 진짜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일단 제일 많이 나온 건, 단연 “군대” 이야기. 군대 이야기는 이제 손쉽다. 이전에도 몇 번 다뤘지만, 이런 ‘억울함’과 ‘공포’를 이해하고 분노의 방향을 잘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왜 군대에 남성만 가게 되었는가?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바라보게끔 한 성차별의 문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그저 여성도 똑같이 군대에 가서 고생하는 것? 진정 필요한 건 정당한 보상과 대우를 받는 것. 그런 환경과 조건을 만들기 위해 목소리 내는 일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 각종 차별과 폭력에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페미니스트가 함께 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어떻게 다루면 좋을까?
앞서 교육에서 페미니즘을 향한 부정적 인식 중 일부가 여성혐오적 역사에 기인함을 설명했음에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지점들이 존재한다. 특히 매번 어디서 보고 오는 지 모를 이야기를 가져오며, ‘페미니스트가 이렇던대요~ 저렇다고 하던데요~’할 때면 하나씩 다 답변하기도 곤란하고, 그저 일부만의 문제로 가르고 이야기할 수도 없어 난처하다.
아직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모르겠지만, 일단 기록차원에서 사용한 방법을 남겨놓으면, 먼저 갈등에 대해 짚었다. 페미니스트는 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까? 그건 없던 문제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했던, 그리고 분명 사람들을 괴롭게 했던, 허나 권력구조에 의해서 드러낼 수 없었던 문제를 드러낼 수 있게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투 운동의 예시를 들어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문제제기, 갈등이 마냥 부정적인 게 아닌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제안임을 언급했다.
그리고 페미니즘 활동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야기했다.
이때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의 다양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이해에 도움이 되는 듯 하다.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구현되는 다양한 시스템이 있다. 미국식과 독일, 일본, 한국의 시스템이 조금씩 다 다르듯, 페미니즘도 다양한 모습과 활동으로 고군분투하며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비판적 사고로 우리사회를 바라보고 성차별과 그에 근거한 착취, 차별, 억압에 저항하는 모든 이라면 페미니스트다. 혹 어떤 페미니스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먼발치에서 손가락질하고 그치는 게 아니라, 페미니스트로서 함께 그 의견을 정정하고 더 나은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하지 않을까.
물론 강의후기에는 이렇게 말했으면 참 좋았겠다 싶은 바람을 잔뜩 담았다.
현실은 그렇게 유려하지 못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목소리가 떨리는 걸 들켰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또 이런 기회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 교육을 의뢰하신 선생님께서 청소년 참여자에게 어땠냐고 물어봤더니, “저런 페미니스트만 있으면 세상이 좋아지겠는데요?”라고 했다 한다. 칭찬도 섞여있지만, 다른 이들과 구분짓기 된 게 아닌가 싶어 조금 찝찝하기도 한 대답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런 식으로 세상을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페미니스트가 있음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이, 그 어떤 강의 내용이나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 더 명징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우울하고 답답한 일상 속에서도 이렇게 조금씩 괜찮은 날들이 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