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모르는 사람들

한국일보 젠더살롱 2022.11.12.

by Nut Crac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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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젠더살롱, 이번 글은 <사과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사과는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제때, 제대로 사과하지 못하고 도망치거나 도리어 성을 내서 사람을 섭하게 만든 기억이 적지 않습니다. 그게 그저 개인간의 일이어도 문제인데, 사회적으로도 그런 경우를 너무 많이 봅니다.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사이다 같은 처벌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필요하고 중요한 게, 문제 행위자의 진심어린 사과와 반성, 성찰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그게 부재한 채, 너무나 오래,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있습니다.


재난, 참사, 사고 이후, 남은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뉴스에서 연이어 쏟아지는 믿기지 않는 일들 앞에 종교도 신도 믿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해야 할까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남은 사람의 애도가, 추모가 그저 자신만을 위하거나 허무하게 흩어 없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썼습니다. 여전히 너무 가볍게 말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남성적 권력'이라는 모호한 말로 문제를 너무 뭉뚱그리나 싶은 염려도 있지만... 그래도 이런 고민도 필요한 거겠죠.


아래 본문 일부와 원문 링크를 남깁니다




<사과를 모르는 사람들>


"미안해."


이 짧은 말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적재적소에 이 말을 못 해서 갈라선 관계, 커진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연애할 때도 마음 상한 상대를 앞에 두고 "아니 그게 아니라…"는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성급하고 성의 없게 "그래 내가 미안해"라는 말을 던져 화를 돋우곤 했다.


... 학창시절, 우리는 언제나 친구들을 놀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만나면 반갑다고 서로 놀리는 게 안부인사였으며 혹여 누군가 이별하거나 시험에서 떨어지면 학교 앞 문방구 사장님까지 알 수 있도록 소식을 퍼다 나르는 게 놀이문화였다. 성역은 없었다. 수험생 시절 각각 '최순사', '이육사'라는 별명으로 불린 친구가 있었다. 지망했던 경찰대학과 육군사관학교 탈락 직후 생긴 별명이었다.


무슨 일이 됐든, 학교에서 우는 건 있어본 적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품으로 눈물 한 방울만 찍어도, "우냐?"에서 "야 이 자식 운다!"가 되고, 소문이 반과 전체 학년을 돌아 '마포구 감성팔이 소년의 폭풍오열 썰'로 사시사철 고통받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금기였다.


...이 정도라면 분명 주변에 불쾌해하는 이가 있을 법도 하건만 자고로 남자라면, 이 모든 과정에 초연하게 너털웃음 지을 수 있어야 했다. 부끄러워 얼굴 붉히거나 듣기 거북해하며 '예민'하게 구는 것은, '계집애' 같은 짓이므로 더 가혹한 놀림거리가 됐다. 야생도 아니었는데 약육강식이었고 혼자 자란 이 없건만 각자도생이었다.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통용되고 피라미드 같은 위계질서가 당연하며, 승리와 패배 이분법만이 자리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건 곧 능력의 증명이고 너저분한 말은 다 패배의 흔적이었기에 사과는 최소 불필요한 짓이거나 그저 나약함의 반증이었다. 그렇게 사과는 점차 자리를 잃었다.


... 이태원 참사 앞에서 또다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익숙한 무력과 절망감을 느꼈다. 해석되지 않는 일들을 마주하며, 마냥 침잠해 있기도 부끄러운 시간을 고통스럽게 지나고 있다. 그런데, 이 비극을 앞에 두고 불필요한 말을 끼얹는 사람, 슬퍼하는 이들을 맥 빠지게 하는 사람을 자주 본다. 그것도 익명에 숨어 댓글에서나 떠드는 게 아니라, 공적인 자리에서 얼굴을 대놓고 그런다. 국가의 총리라는 사람은 참사 직후 외신 기자회견에서 상황에 맞지 않는 농담을 던지고 용산구청장은 핼러윈 때 이태원에 사람들이 몰린 게 '그저 어떤 하나의 현상'이라며,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했다고 말한다.


'국가애도기간'이라는데, 도통 이 추모와 애도가 허망하게만 느껴지는 건, 최전선에서 무엇이라도 해보겠다고 안간힘 쓰던 사람들은 눈물 흘리며 아파하고 사과하는데, 막상 그것을 사전에 대비했어야 할, 더 큰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앉은 이들은 조금도 책임질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다. 이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사과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하다.


... 어느 책 제목이 이야기하듯,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하고, 정치 권력 역시 마찬가지라서, 지금 우리 위정자들은 대체로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는 단지 그들의 성별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기존 남성적 가치관과 정치문법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이야기다. 경쟁과 효율, 개발과 발전, 승리와 패배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고 돌봄과 감정, 생태, 환경과 공존은 등한시되고 있다. 이러한 권력이라면, 참사는 이름과 모습을 바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권김현영은 책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에서 "페미니즘의 목표는 권력을 남성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권력에서 폭력을 제거하고 권력의 의미를 바꾸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것은 젠더의 렌즈로 바라보아야 할, 젠더의 문제다. 지금 우리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국가는, 국가권력의 추모는, 애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 정치 권력이 비단 개인의 호위호식과 입신양명을 위한 수단에 그칠 수 없기에, 끝끝내 제대로 사과할 줄 모르는 이들의 비겁 앞에서 우리는 물을 수밖에 없다.


왜 그 자리에 있는가? 정치란, 국가란, 권력이란 무엇인가?





- 원문 링크 :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211091447000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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