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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꽃봄 May 23. 2023

양양 시골집 계약하기 - 3

보낸 잔금과 열리지 않은 현관문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5월 22일. 햇살집의 소유권이 완전히 넘어오는 날이다. 나와 진 그리고 지우는 부동산 근처인 동산항에 숙소를 구해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흐린 날씨 탓에 맑은 바다가 뿌옇게 철썩였다. 까맣게 날이 저물고 등대 불만이 껌뻑이던 지난밤, 진과 나는 오랜만에 깊은 담소를 나누었다.


  - 은퇴 이후로 미루는 것들, 언제 올지 모를 내일에

양보하는 행복


   어쩌다 보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양양이었다. 그리고 그래서 다행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은퇴 이후의 삶을 상상하며 살고 있다. 하고 싶은 것들은 자연스럽게 은퇴 이후로 미루면서, 또 걱정하면서. 여기까지 와서 보니, 그런 우리네 삶이 참 애잔했다. 내일을 위해 미루고 있는 수많은 행복은 언제쯤 그 모습을 드러낼까? 몽롱한 일상에서 깨고 보니 양양이어서, 나는 참 다행이다.


   날이 밝자마자 잠에서 깬 지우는 창밖 바다 위 하얀 꼬리를 달고 항해하는 배를 보며 동화 같은 이야기를 했다. 배들이 아파서 병원에 간다는 둥, 큰 배는 엄마배, 작은 배는 아가배라는 둥. 지우는 참 맑다.


   체크아웃 시간보다 조금 일찍 숙소를 나섰다가 가방을 두고와 다시 돌아섰다. 계약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는데, 두고 온 가방덕에 바삐 움직이게 되었다. 허겁지겁 도착한 부동산에는 법무사님과, 집주인분과, 어딘가 불편한 통화를 하고 계신 부동산사장님이 계셨다. 이날 다니엘라 부부는 일 때문에 서류와 도장을 우리에게 위탁했다.


   부동산의 엄숙한 분위기에 천진난만하던 지우가 조용해졌다. 가끔 하고 싶은 말은 소곤소곤 귓속말로 해주었는데, 주로 옆의 흔들의자에 앉아보고 싶다던지, 아기 고양이가 보고 싶다던지 하던 말이었다.


    200km 거리의 다니엘라 부부는 계약시간까지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의 사인에 맞춰 송금을 했고, 법무사 분과 확인해야 할 사항들을 맡아 처리했다. 순식간에 햇살집이 우리 집이 되었다. (전) 집주인 분은 당신에겐 더 이상 필요치 않고, 우리에겐 이제 막 필요한 것들을 남기고 가겠다고 하셨다. 그냥 주겠다는 것도 있었고, 저렴하게 넘기겠다는 것도 있었는데, 예초기, 전기톱, 사다리 같은 것들은 거저 샀다. 그녀에게도 우리에게도 유리한 거래였다.


   계약이 끝난 후에는 집 근처 읍사무소로 향했다. 진이 단신으로 전입신고를 하고, 쓰레기봉투 몇 장과 온누리 상품권을 선물로 받아왔다. 진의 면허증에는 새로운 주소가 붙여졌다. ‘이제 강원도민 할인도 받을 수 있겠다’하며 허허, 웃었다.



    다시 찾은 햇살집엔 풀이 무성했다. 왕성한 생명력의 풀들 외에는 모든 것이 고요하다. 집 앞 개울은 풀로 뒤덮여 시선 닿는 곳이 모두 꽃밭이었다. 뒷마당 빈 개집에 태어났던 새끼고양이들은 보금자리를 옮긴 듯했다. 아기고양이를 고대하던 지우가 실망할 세라, 차 안에서 잠든 이쁜 아이를 깨우지 않았다.

 

   비로소 우리의 햇살이 된 집을 찬찬히 뜯어 살폈다. 분명 우리의 소유가 되었으나 아직 현관문을 열 수는 없었다. 지난 계약 때 (전) 집주인분이 부탁한 3일의 시간이 남아서였다. 아파트와는 다르게 주택의 공과금은 한전, 상하수도 사업부에 쓴 만큼의 금액을 바로 납부할 수 있어서, 완전히 짐이 빠지는 25일을 기준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텅 빈 햇살집은 어떤 모습일까.


   고요한 햇살집. 별채와 마당을 둘러보는 나와 진의 풀 밟는 소리, 바람에 삐걱거리는 나무 문 소리, 그리고 이따금씩 지저귀는 새소리가 났다. 주말마다 만날 다채로운 빛의 바다와, 파란 하늘, 그리고 푸른 산, 따스한 햇살, 오늘 우리는 그 일련의 것들을 샀다.


   다음 주말 다시 찾을 햇살집. 마당의 풀을 쉬이 정리할 수 있도록 시원한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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