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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Nov 30. 2023

선물의 여왕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 선물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고르는 일은 쉽지 않다. 절친한 사람을 위한 선물이라고 해서 쉬운 것도 아니고, 가깝지 않은 지인에게 의례적으로 건네는 용도라면 더욱 어렵다.


선물을 받는 사람의 취향에 맞으면서도 서로 부담이 되지 않는 적당한 가격대, 이왕이면 그 사람에게 오래도록 쓸모가 있을 만한 것.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이상적인 선물을 찾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한다. 인터넷에 '40대 여성 선물 00만원대', '50대 남성 선물', '남자 초등생 생일선물' 등을 검색해 보는 사이버 수사로 가볍게 시작해 주변 지인들에게 물어보는 탐문 조사를 거쳐 오프라인 쇼핑몰 곳곳을 누비며 수색을 실시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정확한 타깃을 발견하는 유레카의 순간이 온다.


선물 하나를 고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 너무 번거롭게 느껴지는 탓일까. 언젠가부터 부모님처럼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는 현금을 주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 되어버렸다. "부모님 마음대로 쓰실 수 있으니 현금이 최고의 선물"이라고 포장하지만, 그 말을 살짝 비틀면 "부모님 마음에 쏙 드는 거 못 찾겠어요. 돈으로 드릴 테니 알아서 골라보세요."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부모님 마음껏 쓰실 수 있게 돈으로 드리는 게 뭐가 나쁘냐'라고 한다면, 글쎄 '마음껏 쓰실 수 있는' 정도로 현금을 선물하는 자식들이 얼마나 되려나. 게다가 어떤 부모님들은 자식이 준 돈은 못내 마음에 걸려 함부로 쓰지 못하고 고이 간직했다가 결국 자식을 위해 쓴다. '현금이 실용적'이라는 말에는 일부 동의하지만, 원래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 자체가 실용적이거나 합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깔끔하게 안 주고 안 받는 게 가장 실용적이지. '어떤 물건에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을 담아 전한다'라는 선물의 목적부터가 합리성, 실용성의 측면에서 바라보기에는 너무 낭만적이지 않은가.




함께 살을 부딪히며 사는 가족에게도 딱 맞는 선물을 고르기가 어려운데, 매일 한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깊은 속내를 여간해서는 알기 쉽지 않은 직장 동료를 위한 선물은 정말로 부담되는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어려운 미션을 매번 훌륭히 성공하는 회사 선배가 있다. 선물의 여왕이라고 불러도 될 그녀는 같은 팀에서 몇 년간 호흡을 맞췄는데, 사소한 말 한마디나 행동에서 내 마음을 정확히 읽어내고 꼭 필요한 선물을 안겨주곤 했다.


여자들이 흔히 받는 선물 중 하나는 핸드크림이다. 유통기한이 보통 3년씩은 되고, 개봉하지 않는 한 썩지도 않고, 있으면 언젠가 쓰는 품목이니까 많이들 주고받는다. 선물용으로 인기 좋은 특정 브랜드도 있다. 그런데 내 생일에 그녀에게 받은 핸드크림은 그저 흔한 선물이 아니었다. 언젠가 그녀가 옆에서 핸드크림을 바르는데 향이 굉장히 독특하면서도 내 취향에 잘 맞고, 잔향이 또 오래가길래 어느 브랜드 크림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선배 역시 다른 이에게 선물 받은 핸드크림이었는데, 통상 사람들이 많이 사는 브랜드에 비해 고가인 제품이었다.


아, 향은 진짜 좋은데 비싸네요. 사지는 못하겠다~

 

가격을 알고 나서는 선물로 받은 크림도 아직 많은데 싶어 다시는 그 제품에 대해 언급도 하지 않았고 이내 잊어버리고 있었다. 얼마 후 생일이 돌아왔을 때, 그녀가 선물이라며 건넨 상자 속에는 바로 그 핸드크림이 곱게 자리 잡고 있었다. 깜짝 놀라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있는 내게, 선배는 그때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냐며 웃었다. 모처럼 취향에 꼭 맞는 핸드크림을 발견하고도 '내 손에' 바르는 제품에 그 정도 돈을 지불할 수는 없다며 포기해 버린 내게, 그녀는 나보다 더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그 크림을 건네주었다.

출처 : Unsplash



그다음 생일에도, 여름휴가에서 돌아왔을 때도, 또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날 불쑥, 그녀는 세심한 마음을 담은 선물로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우곤 했다. 점심식사 후 산책 삼아 들른 뷰티숍에서 패디큐어 스티커를 한참 들었다 놨다 하다 결국에는 사지 않고 돌아선 적이 있는데, 며칠 후 휴가를 가는 내게 여행 가서 쓰라며 바로 그 스티커를 건네주기도 했다. 선배에게 빌린 소설을 읽다가 이 작품 오랜만에 만난 최고라고 극찬하자 그 책을 선뜻 준 적도 있다. 본인보다 그 책을 더 아껴줄 사람에게 주고 싶다는 이유로.




같은 팀에서 몇 년을 동고동락했던 선배는 얼마 전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났다. 선배를 떠나보내는 날 하필 개인 사정이 있어 출근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어김없이 내 자리에 무언가를 두고 떠났다.


다정한 말이 담긴 쪽지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선물로 놓고 간 그녀.


출처 : 예스24


선배가 앉았던 자리는 휑하게 비어 있었고,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던 그녀의 마음만 덩그러니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책은 사실 얼마 전 구입해 놓고 서재에서 한 페이지도 못 열어본 채 서재에서 잠들어 있었는데, 선배가 선물로 주면 그때 읽어보라는 하늘의 뜻이었을까? (라고 나의 게으름을 아름답게 포장해 본다.)


선물로 받은 책은 선배와 함께 한 추억을 간직한 채 한 장 한 장 찬찬히 읽어보려 한다. 사두고 고이 보관만 해놓았던 똑같은 책은 누군가 받으면 좋아할 사람에게 선물로 해도 좋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을 좋아할 사람은 내 주변에 누가 있을지 차분히 떠올려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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