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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Dec 03. 2023

화려한 술잔과 편안한 술상

출장을 다녀오며 드는 단상

*사진 : Unsplash의 Oliur

  

수요일에서 목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나는 배낭에 세면도구들을 집어넣고 있었다. 목요일 아침 부산으로 가는 KTX에 몸을 싣고 1박 2일간 출장을 떠나기 때문이다. 출장 전 체크해야 할 문서들을 점검하고 오느라 녹초가 된 상태였는데, 새벽 2시가 넘도록 잠을 못 자고 있으니 신경은 날카롭고 몸은 더욱 처졌다. 이런 날은 퇴근하자마자 곧바로 출장 짐을 챙기고 일찍 잠들면 좋겠는데, 워킹맘은 아이 책가방과 준비물 챙기는 게 우선이다. 아이 재우고 집 정리 하다 보면 출장 가방 싸는 일은 가장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겨우 짐을 챙기고 무언가 중요한 걸 안 넣었을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외면한 채 4시간 후면 울릴 알람을 확인하고 눈을 붙였다.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요즘 워낙 깜박깜박하는지라 내일 출발하는 기차 시간을 착각한 건 아닌지 몇 번이고 확인고, 출장기간 동안 '일어날지도 모르는' 각종 문제들이 자꾸 떠올랐다. 엄마가 출장 가면 꼭 목이 아프거나 열이 나는 아이가 이번에는 괜찮을지, 금요일에 아이 한자 시험 보는 날인데 수험표며 수정 테이프며 제대로 챙겨가려는지, 하교 시간이 이번 주 금요일에만 달라지는데 남편이 제대로 알고 있는지 등등.


걱정에 빠져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설핏 잠이 들었다가, 선잠에서 깨다가를 반복하며 아침을 맞았다. 마지막으로 출장 가방을 체크한 후, 아이에게 내일모레 만나자고 인사하며 입을 맞추고 집을 나섰다. 겨울 아침의 매서운 바람이 인정사정없이 몸속을 파고들고 커다란 업무용 노트북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지만, 마음만은 한결 가벼워졌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내가 없는 집이 어찌 돌아갈지 걱정되어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는데, 마치 모든 걱정거리들을 집에 두고 온 사람처럼 집에서 한 발짝씩 물리적으로 멀어질수록 마음의 짐도 1그램씩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제시간에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싣자, 마음이 가벼워지는 차원을 넘어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시야를 휙휙 지나가는 강과 산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챙겨 온 책을 꺼내 들고 한참을 읽다가, 잠시 눈을 감고 음악도 들었다가, 완벽한 혼자로서의 시간을 마음껏 즐겼다.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누구도 나를 부르거나 찾지 않는 상태로 편안하게 한 자리에 앉아있는 일은 실로 오랜만에 즐기는 호사다. 그동안 늘 부르짖던 "좀 혼자 있고 싶다!"는 소원을 이룬 기쁨에 젖어 속으로 몇 번이고 '아이고 좋다~'를 외쳤다.


부산역에 도착해 직장 동료들과 만나면서부터 완벽했던 혼자만의 시간은 끝났지만, 앞으로 1박 2일간 '나 하나만 챙기면 되는 삶'이 남아 있었다. 업무협의와 다양한 직원들과의 면담으로 꽉 짜인 일정을 소화하며 기력을 소진했지만, 녹초가 된 몸으로 집을 돌보고 아이를 챙길 필요가 없어서 부담이 덜했다. 집으로 다시 출근할 필요 없이 함께 간 동료들과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며 체력을 보충하고, 고즈넉한 카페에 들러 달달한 디저트를 먹으며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유자 하이볼이 빛나는 화려한 테이블을 보고 있자니 마치 힙한 싱글여성이라도 된 기분이었고, 초조하게 집에 갈 시간을 확인할 필요 없이 마음 편히 홀짝홀짝 상큼한 하이볼을 음미했다.



밤이 늦어서야 숙소로 돌아왔지만 딱히 걱정되는 건 없었다. 그저 지친 내 한 몸 씻고, 바로 침대에 누우면 되니까. 게다가 저 침대는 나 혼자 쓰는 거니까, 팔다리를 쭉쭉 펴도 누구 하나 걸리는 사람 없으니까! 또다시 기차에서처럼 '아이고 좋다아~~'를 외치며 따끈한 물에 샤워를 하고 몸을 뉘었다.


다음날 아침도 평소보다 한결 여유로웠다. 아이 학교 갈 준비와 출근 준비를 동시에 하며 초 단위로 움직이던 분주함은 없다. "밥 다 먹었니?" "양치해야지 얼른~" 같은 말 한마디 할 필요 없이 오로지 내 준비만 하면 되는 고요한 아침. 모처럼 깔끔하게 화장을 마무리하고 귀걸이며 반지도 껴보고, 평소에는 가방에 쑤셔 넣고 나오던 머플러를 거울 앞에서 얌전히 두르고 방을 나섰다.




이틀째 일정도 숨 가쁘게 마치고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 출장지로 출발할 때는 집에서 멀어지며 점점 홀가분해졌던 것과 반대로, 집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바빠진다. 오늘 시험은 무사히 봤는지, 지금 학원에 잘 가 있는지, 저녁은 또 어떻게 할 건지 등등 물어보고 주말 가족모임과 아이 친구 생일파티 일정을 체크하는 한편, 아이 미용실 갈 시간이 언제가 좋을지 따져보며 예약창을 켠다. 그렇게 온갖 사소한 일들의 파도에 밀리는 와중에 지난 1박 2일간의 시간을 떠올려본다. 오직 나 하나만 챙기면 되는 삶, 철저히 업무에만 몰입했다가 퇴근 후에는 홀로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 인생은 얼마나 효율적이고 생산적 일지 잠시 상상해 본다.


짐이 늘어난 것도 아닌데 돌아오는 길의 짐가방은 출발할 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녹초가 되어도 내 마음대로 쉴 수 없는 인생으로 이틀 만에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하니 피로가 더 쌓이는 느낌이었다. 터덜터덜 집 앞에 도착해 힘없이 문을 연 순간, 아이가 강아지처럼 달려와 품에 쏙 안긴다. 말랑말랑한 아이의 몸이 너무 포근해서,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한동안 꼬옥 아이를 안고 있었다. 출장 기간 내내 마라톤 회의와 면담을 이어가며 쌓였던 긴장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홀로 호텔방 침대에 대자로 누워 좋다고 외치던 순간의 느긋하고 여유로운 기분과는 다른, 강력하고 빠르게 몸속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모자의 뜨거운 상봉을 뒤에서 함께 하던 남편은 얼른 씻고 오라며 주섬주섬 식탁에 배달음식을 차렸다. 내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서 남편이 시킨 치킨이 모락모락 김을 뿜으며 고소한 튀김 냄새를 풍겼다. 군침을 삼키며 냉장고에서 하나 남은 흑맥주를 꺼냈다. 바로 전날 저녁 내 앞에는 예쁜 접시 위에 담긴 과일 플래터, 감각적인 잔에 담긴 유자 하이볼이 멋들어진 원목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는데, 오늘 마주한 식탁에는 접시에 옮겨 담지도 않은 치킨들이 배달박스째 덩그러니 올라가 있다. 캔맥주도 잔에 따르지 않은 채 미학적 요소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날 것의 식탁이다.


하지만 전날 그 화려한 테이블에 함께 앉아있던 이들은 업무가 아니면 연락할 일도 없는 철저한 타인이다. 오늘 이 소박한 식탁을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은 나와 매일 살을 맞대고 사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무조건적으로 언제고 내 편이 되어줄 나의 가족. 내 몸보다 더 챙기고 돌보느라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큰 에너지를 돌려주는 소중한 이들.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키며 남아있던 피로를 내려보낸다. 그래, 나 집에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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