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틀 일이 거의 없는, 아니 TV 앞에 편안하게 앉아있던 날들이 까마득한 옛일처럼 여겨질 정도로 분초를 다투는 내 삶에서 화제의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시청하는 건 우선순위에 들어올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선재 업고 튀어>라는 드라마가 난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아니, 무슨 제목이 저렇게 유치해' 라며 한 번 피식 웃고 무심히 넘겨버렸고, 관련 팝업 매장에 해외에서까지 팬들이 찾아와 연일 장사진을 이룬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주인공이 직접 오는 것도 아닌데 왜들 줄 서서 기다리는 거지?'라는 생각만 떠오를 뿐 그토록 드라마와 선재라는 캐릭터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선재 업고 튀어>의 본방이 끝날 때까지도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 딱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넌지시 알려준 지인의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굳이 없는 시간을 쪼개 한 번 대강이라도 다시 보기를 할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다.
대형사고가 일어나는 건 한 순간이지만, 대개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작은 징조들이 있다.대형사고가 나기 전 그와 관련된 수많은 징후들과 작은 사고들이 일어난다는 주장을 통계화한 '하인리히의 법칙'이 이런 현상을 설명한다.1:29:300의 법칙으로도 불리는 이 주장은 중상자 1명이 나왔다면 그전에 이미 같은 원인으로 경상을 입은 사람이 29명,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이 있었을 거라는 내용이다.
태어나 엄청난 덕질을 한 적은 없었지만 많이 좋아하는 연예인들이 드문드문 있었고, 그들 대부분 변우석 배우처럼 흰 피부와 슬림한 체형의 소유자들이었다. 게다가 최근의 나는 개인 사정과 업무 부담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로 인해 불면증에 시달리며 새벽까지 넷플릭스를 틀어놓는 날들이 잦아지고 있었다. 고로 조금씩 조금씩, 드라마와 남자 주인공에게 빠져들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법칙이고 통계고, 원인이 무엇이었고는 중요하지 않다. 수없이 많은 이유와 징후들이 있었다고 해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피하지도 못했으니까. 나는 이미 류선재라는 캐릭터에, 배우 변우석에 덕통 사고*를 제대로 당해서 뇌 구조 전체가 바뀌어버린 상태니까.
(*뜻밖에 일어난 교통사고처럼, 어떤 일을 계기로 하여 갑자기 어떤 대상에 몹시 집중하거나 집착하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출처 : 네이버 사전)
덕질과 관련해 인터넷에 떠도는 유명한 말이 지금의 내 상태를 가장 정확히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최애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다. 최애가 갑자기 와서 심장을 때리며 '오늘부터 내가 니 최애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배우가 갑자기 일상 속으로 훅 밀고 들어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40대 평범한 워킹맘으로 살던 사람이 눈 뜨자마자부터 꿈결 속을 헤매는 순간까지 온통 변우석으로 가득 찬 하루를 보내게될 줄을 어느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이 여름의 특별한 경험을 글의 형태로 남겨 놓고자 한다. 시간이 지나 배우 변우석을 좋아했던 2024년의 여름이 이불킥을 부르는 부끄러운 날들로 기억하게 될지라도, 인생은 참으로 예상할 수 없고 오묘한 것이라는 걸 되새기기 위해서라도 지금 이 순간들을 공감해 줄 사람들이 어딘가 있을 거라 믿으며 함께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