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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봄 Jun 15. 2024

여기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밀리터리 시크릿 04

이런 일 하려고  네시간만 자면서 대학 가고  어학연수 가고 스펙 쌓고 피나게 채 준비하고 그런 줄 압니까? 제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까? 여기는 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네요.

2014년 작품 미생-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직장드라마의  레전드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완벽한 스펙과 능력으로 무장한 신입사원이 모여서 수근수근거리고 누군가는 바로 위 선배에게 호소한다. 그리고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생각해 봤을 것이다.


군인은 뭐 다를 게 있을까?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초급장교들은 외부 환경의 영향과 소위라는 계급의 무게 때문에 더 다양한 갈등 상황에 빠지게 된다. 

낯선 일, 환경, 사람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는 것이 사회생활의 시작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도시에 나만 혼자 떨어져서,  메가커피가 블루보틀 수준으로 대접받고 프랜차이즈 빵집도 없고 어딜 가나 젊은 사람은 군인뿐인 곳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일의 경중과는 별개로 마음이 더 힘들어진다. 많은 초급간부들이 우울감을 느낀다. 내가 살던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일이 힘들어도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하소연도 하고 소통도 하면 마음이 덜 힘들 텐데 전방부대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된 초급장교들은 심한 우울감을 느끼기도 한다. 병사로 입대한 인원들은 그나마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들이 있고, 함께 전입하는 동기들이 있는데 초급간부들은 거의 혼자서 생활하게 된다. 완전히 나 혼자라는 것이 주는 외로움과 허전함을 견뎌내어야 한다.


더구나 소위라는 계급은 장교 계급의 첫 단계에 있는 사람이다 보니 아주 다양한 모습을 요구받게 된다. 병사들에게는 모범이 되는 소대장, 부사관들에게는 믿고 따를 수 있는 지휘자, 선임 장교들에게는 제 몫을 충분히 다하고,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부하이자 전우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 세 가지 위치 중에서 한 가지라도 잘못되면 그 갈등은 사람을 막다른 곳으로 내몰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의 중심에는 사람과 일이 있다. 사람이 먼저이고 그다음은 일이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를 칼로 자르듯이 자를 수가 없다. 군대조직에서 협업하지 않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직책을 하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 특히, 초급간부 때에는 그런 자리에 있을 수가 없다. 뭐지?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군대에 온 것이 아닌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을 시키는 거지?  나한테 중요한 일을 안 시키고 허드레 일만 주는 거지? 나는 참모인데 왜 병력관리까지 시키는 거지? 철저한 계급사회라더니 부대에 먼저 온 순서대로 인 건가? 저 사람들은 왜 나를 존중해 주지 않지? 한동안 혼란의 시기를 겪게 된다.


그 혼란의 시기를 잘 넘기는 가장 빠른 길은 한동안 일에 미쳐서 몰입하는 것이다.  일의 질과 양을 따지지 말고 한동안은 그 일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 것인가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일하는 방법도 배우고, 일 안에서 관계를 형성하는 법도 배우게 된다. 어렵거나 하기 싫은 일이라도 내 직책에 맞지 않는 일이 주어지더라도 성실하게 해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을 얻을 수 있다.



나의 첫 부대는 강원도 화천에 있는 곳이었다. 국토의 70%가 산이고 태백산맥이 등줄기고 배우기는 열심히 배웠지만 화천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곳은 우리나라가 맞는가 싶었다. 부산에서 자라난 내 눈에 화천은 뭐랄까 거대한 산과 물로 둘러싸인 요새처럼 보였다. 땅을 밟고 있는 한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곳.


참모장교로 명령을 받았고, 당연히 사무실에서 조용히 앉아서 일을 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교육 중에도 그 직책에 대해 더 유심히 공부했었다. 기대감 가득한 상태로 도착한 부대에서 내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장교는 가장 밑바닥부터 배워야 해. 밑바닥을 모르고 처음부터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나중에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어. 군대가 쉬워 보이지."


나의 첫 대대장님이 내게 임무를 부여하면서 한 말이다. 나는 폐품 관리와 소대장직을 병행하게 되었다. 폐품은 여러 부대에서 사용하다가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한다고 판단된 물품들을 말하는데 창고에 모았다가 일부는 부대 안에 있는 소각장에서 태우고, 일부는 5톤 트럭에 실어서 상급부대에 반납한다. 폐품을 관리하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라는 사람이 그 창고 속에 있는 폐품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이제 막 기분 좋게 호기롭게 군생활을 시작하려는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 깨진 유리창이 되는 것 같았다. 


"신임 소대장이 왔으니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보자. 폐품 창고도 신품 창고처럼 깨끗하게 정리해 봐"


겨우 마음을 억누르면서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폐품창고를 새 창고처럼 깨끗하게 정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마음 깊이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닌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부당한 지시라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전체 회의시간에 지시된 일이 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군인의 제1의 덕목 상명하복 상관의 명령에 복종한다. 그런데 너무너무 하기 싫었다.


업무처로 향하는 내 얼굴에 분명히 분노가 서려있었을 것이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병사들에게도 그것이 보였을 것이다. 그중에서 소각장에서 폐품 태우는 일을 담당하고 있던 한 병사가 슬그머니 다가와서 말했다.

"소대장님, 얼른 해버리십시오. 어차피 해야 할 건데 미룬다고 좋을 거 없습니다."

회의시간에 있었던 일은 내 입보다 행정병의 입을 통해 이미 전파되어 있었다.

"아니, 너는 그게 가능한 거라 생각해? 저 쓰레기 더미를 지금까지 저렇게 놔둔 걸 어떻게? 아 진짜..."

결국 나는 내 소대원에게 푸념을 늘어놓고 말았다.


내가 소대장과 참모 2개의 모자를 쓰고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주었고, 나를 제외한 다른 4명의 소대장들도 각자 다른 일들을 맡아서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다른 장교들은 다 장교스러운 일을 하고 있었다. 나만 현장 부사관들이 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 속상했고,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가뜩이나 그 일을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뜬금없는 추가 지시에 너무 화가 났던 것이다.

 

임무를 부여받을 때부터 내 생각에 가득 차서 그 일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았다. 방법을 찾으러 애쓰지 않고, 상황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불평만 하고 있는 소대장이 안타까웠는지 군대생활 2년 차 소대원이 함께 하면 되니까 얼른 해치워버리자고 말을 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의 알량한 자격지심과 자존심 때문에 군대에서 당연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명령을 받는 태도와 명령이행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퇴근하는 길은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상급자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나의 잘못된 태도에 화가 났고, 병사에게 충고를 받았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그로부터 2주 동안 주말도 다 반납하고 5명의 폐품관리 대원들과 함께 일을 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모포, 침낭, 전투복, 전투화들을 모두 창고 밖으로 꺼내고 먼지를 털고 짝을 맞추고 깨끗이 개어서 차곡차곡 쌓는 일을 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창고에 쌓여있었는지 생전 처음 맡아보는 이상한 냄새는 코를 찔렀고, 먼지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었다. 


마스크라도 밖에서 사서 사용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어서 다 같이 방독면을 꺼내 쓰고 작업을 했는데 그게 오히려 더 숨이 막혔다. 수건을 얼굴에 두르고 일을 했다가 숨을 참고 일을 했다가 교대로 했다가 진짜 난생처음 겪어보는 극한의 노동의 시간이었다. 장갑을 끼고 일을 했지만 피부 깊숙이 베인 냄새는 씻어도 사라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대대장님의 사열을 받았다.


"제법이네. 뭐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네."


그 한마디가 끝이었지만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은 것이니 그 정도면 성공이었다. 그리고 일을 잘 끝낸 기념으로 과자파티를 했다. 요즘 같으면 치킨이나 피자를 배달시켜 먹었겠지만... 각자 원하는 과자 한 봉지와 초코파이 한 개,  콜라 하나씩 들고 둘러앉아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웃으며 이야기하는 작은 파티도 눈물겹게 즐겁고 행복했다.


그 일을 경험하고 나서 우리 소대원들은 더 끈끈해졌고, 그 후로도 더 엄청난 육체적 노동을 수반하는 일들이 있었고, 힘든 순간마다 갈등도 있었지만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아끼며 군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초급장교였던 나는 사람과 일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 일 이후로 나는 성과 있는 일을 통해서 조직원의 관계가 더 좋아지고 견고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군대는 기업처럼 이윤을 창출하는 조직이 아니다. 그렇지만 모든 일에는 결과가 있고, 그 결과에 따라 부대의 사기가 좌우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과를 통해서 조직관리를 하는 것이 더 힘들다. 깊이 있게 고민하고 연구해야 한다. 일을 어떻게 하면 잘하는 것일까 쉴 새 없이 고민해야 한다. 더 크고 중요한 일들을 맡겨도 좋은 사람이라는 신뢰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조직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군대는 무려 45만 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거대한 조직이다. 이 조직을 항상 살아있게 움직이기 위해서 기획, 계획, 평가, 훈련, 작전, 정보, 인사, 군수, 재정, 정훈, 획득, 교육, 법무, 의무, 군의 등 많은 분야에서 유기적인 협력과 조직활성화와 업무 효율성 강화를 위한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초급간부들이 수행하는 일은 때로는 하찮게 느껴지기도 하고 의미 없는 일이라 여겨지기도 하고 큰 성과가 나지 않기도 한 일들이 많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대충 설렁설렁해도 기회만 잘 잡으면 된다고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 안 된다. 내 일에 최선을 다하고 어떻게 하면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을까 고민하고 능력을 인정받는 과정이 없이는 어떤 열매도 얻을 수가 없다.


내가 있을 자리는 내가 만드는 것이다. 

아무도 내 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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