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봄 May 18. 2023

소복 입은 여자 귀신이 나타난다

#3. 서늘한 만남, 뜨거운 안녕

중대장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병사들과 소통하는 일이다. 병사들은 앞에 앉혀놓고 대화를 하자고 하면 주로 '예, 아니요'만 하다가 나간다. 아주 가끔 스스로 찾아와서 이러쿵저러쿵 수다를 떨고 가는 병사들도 있지만 대체로 내가 말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아무래도 전문 상담사도 아니고 중대장과 마음을 탁 터놓고 대화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모든 화장실의 각 칸에는 건의함과 종이, 펜이 비치되어 있다. 그리고 가장 한 달에 한 번씩 마음의 편지라는 것을 받는 시간을 갖는다. 제목도 누가 지었는지 마음의 편지라니.. 어쨌든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중대장에게 편지로 쓰라는 뜻이다.


130명이 넘으니까 마음의 편지를 받는 것도 일은 일이다. 처음에는 하얀 종이만 돌아왔는데 한 글자라도 쓰라고 안 쓰면 못 나가게 할 거라고 계속 엄포를 놓으니 '한 글자'이렇게 쓰고 나가는 녀석들도 있고, '귀찮음''마음의 편지 안 쓰게 해 주세요'이런 말도 있고 별별 말이 다 있지만 다 영양가가 없는 글이다. 누가 제일 늦게까지 앉아있다가 나갔는지 그걸 보고 있다가 꼭 시비 거는 녀석들이 있었을 거다. 그래서 진짜 편지 쓰듯이 쓰라고 편지 봉투와 풀을 나누어 주었다. 처음에는 소대별로 편지를 받다가 계급별로 동기별로 나누어서 편지를 받았다. 그러자 봇물 터지듯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쏟아졌는데 그중에서 압도적인 1등은 귀신이었다.


마음의 편지 1

중대장님. 저 진짜 후문 초소 야간 근무 못 서겠습니다

너무 무섭습니다.

하얀 소복 입고 머리 풀어헤친 귀신이 보입니다.

근무 서다 너무 놀래서 아직도 심장이 콩닥거립니다.


마음의 편지 2

중대장님. 봉안소에서 파란 연기가 솟아오르는 걸 봤습니다. 귀신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들이 군 복무를 잘하기 위해서 후문 초소 근무를 꼭 없애주십시오.


마음의 편지 3

저 후문 근무만 빼주시면 뭐든 다 할 수 있습니다. 후문 근무 좀 빼주십시오.

솔직히 너무 무섭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매번 마음의 편지에 나오고 있었다. 그냥 근무가 서기 싫다고 하지 무슨 소복 입은 귀신타령이야?? 봉안소에 남자밖에 없는데 남자 귀신 봤다면 이해하겠지만 여자귀신은 좀 믿어주기가 어렵다. 지금 2000년대야. 소복 입은 귀신이 어딨어??? 그리고 미안하지만 초소 근무를 안서는 일은 미안하지만 내 권한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근무는 명령인데 누구는 빼주고 누구는 세우고 그럴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근무는 그냥 서는 것으로 하자.


마음의 편지 4

중대장님. 지난달에도 얘기하라고 하셔서 말했는데 바뀌는 게 없습니다. 그래도 말하라 하시니 또 말씀드립니다. 후문 근무는 진짜로 너무 무섭습니다. 지난 근무 때도 분명 하얀 소복 입은 귀신을 보았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너무 잘 알겠지만 의견을 내라고 해도 잘 안 하는 분위기가 있다. 

부대 사정 뻔히 아니까 말해도 못 해 주는 게 더 많으니까... 괜히 뭐 적었다가 선임병에게 갈굼(?)당할까봐 쓰고 싶어도 못쓰는 것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편지에 등장하는 귀신 이야기가 답답했지만 그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너희들 마음은 잘 알겠는데 총을 든 적군도 아니고 요즘 같은 세상에 귀신이 보여서 무서워서 초소 근무를 없애달라니 그걸 누가 받아줄 수 있겠니? 말은 이렇게 하지만 야간에 그 봉안소 쪽으로 순찰 돌면 어른들도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데 병사들이 무섭다고 말을 하는 게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 같다.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해서라도 봉안소를 개선하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이전 02화 부대에서 20년 동안 살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