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골당은 어떻게 생겼을까?
#5. 서늘한 만남, 뜨거운 안녕
내가 봉안소를 지키던 그때 나의 나이는 서른 초반 이었다. 그때까지 한번도 납골당을 가 본 적이 없다. 일단 봉안소 리모델링을 해 보자는 말을 했지만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손이 잡히지 않았다. 봉안소장 박상사는 자기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그 일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나의 몫이니 일을 하는 것은 박상사가 하게 두더라도 방향은 정해주어야 했다.
견학을 가보자! 외부 봉안시설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 눈으로 보고 난 후에 비슷하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시립 화장터에 공문을 보냈다. 화장장과 납골당 견학을 요청하니 잘 설명을 해 달라는 내용을 담았다. 시립 화장터는 우리 부대와 담을 맞대고 있는 곳이다. 후문이 열리면 시립화장터에서 화장해서 골분 된 유골이 유골함에 담겨서 부대로 들어온다.
유골이 들어오지도 않는데 후문이 열렸다. 봉안소장 박상사와 함께 벽제화장터에 방문을 하러 가는 날이다. 후문을 열고 내려가는 길은 수풀이 무성하고 겨우 사람이 다닐 정도의 길만 연결되어 있다. 처음으로 걸어가는 길이 아주 낯설고 음산한 기분이 든다. 분명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는데 사방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비포장 도로를 십여분 걸어 내려오니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로 이어진다. 참 화장장 견학을 다 하게 되다니...
지금은 인터넷 홈페이지도 만들어져 있고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는데 그때는 전화로 확인하거나 찾아가지 않으면 정보를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업무상 목적에 의해서 화장장을 방문하기는 했지만 뭐 궁금한걸 꼬치꼬치 캐묻기도 민망하고 죽은 분들과 가족들이 꺼이꺼이 울고 있는 현장을 전투복 차림으로 견학한다는 것도 참 멋쩍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확인해야 할 것들만 확인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처음 알게 된 화장장과 납골당 운영의 비밀은 생각보다 아주 복잡했다. 사람이 죽으면 그 뒷일을 처리하는 것도 뭘 좀 알고 있는게 좋을 것 같았다.
1. 화장은 시간을 예약해야 하고 시설이 위치한 지역주민과 그 외 지역 주민의 화장 비용이 차이가 난다. 미리 화장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
2. 골분까지 끝나려면 2시간 넘게 걸리는데 골분 된 유골을 담는 항아리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몇십만 원에서 몇백만 원까지 차이가 난다.
3. 묘지에 모시기를 원하는 분이 많지만 토지가 여유가 없어서 납골당으로 모시고 있다. 납골당도 1층부터 12층까지 있는데 중간층은 보관료가 비싸고 젤 아래층과 꼭대기층은 보관료가 좀 싸다. 햇볕이 잘 드는 칸은 좀 더 비싸다.
4. 납골당에 모실 수 있는 최대 기간은 10년이다. 그 이후에는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5. 드라마나 영화에서 골분 된 가루를 산이나 바다에 뿌리는데 그것은 허가되지 않는 행위이다. 적발되면 벌금이 부과된다.
죽는 순간에도 죽어서도 돈이 문제로구나. 죽는 순간에도 죽어서도 돈이 사람의 가치를 대변해 준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니까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유골을 담는 항아리 가격이 천차만별이라는 것도 납골당도 로열층이 있다는 것도 평생 동안 한 곳에 모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10년 동안만 모실 수 있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제일 꼭대기층에 모시면 손도 닿지 않으니까 사진을 붙여놓아도 보이지 않고 다시 방문을 해도 유골함도 보이지 않는다. 맨 아래층에 모시면 쪼그리고 앉아서 들여다봐야 하는데 내 발바닥과 같은 위치에 있으니 눈으로 보기가 참 힘들다. 그러니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손이 잘 닿는 곳에 모시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할 것 같다. 그래서 거의 2배 정도 비싸다. 그것도 일면 당연히 비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립화장장은 한번 납골당에 봉안하면 평생 그곳에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시설은 시민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최대 10년이라고 정해두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가족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서 보관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사립 추모원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갑자기 부모님을 모시려면 땅을 좀 구매해야 하는 건가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한참 젊으셨지만 돌아가시면 설악산 어귀에 뿌려달라고 죽어서라도 바람 따라 훨훨 날아다니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도 불법이라고 하니 이 사실을 알려드려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견학 잘 마치고 돌아오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을 사극이나 대하드라마에서 많이 들었는데 진짜 죽어서 가루 되어서 천만 원짜리 항아리에 담기면 어떻고 십만 원짜리 항아리에 담기면 어떨까? 그곳에서도 천만 원 항아리와 십만 원 항아리 사이에 계층이 생기고 그럴까? 돈이 없으면 장례도 못 치르겠구나. 장례 치르는데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구나. 죽기 전에 장례비는 저축해 두고 죽어야겠구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허무함보다는 죽음이라는 이름의 현실을 너무 정확하게 알게 된 날이었다. 비로소 20년 동안 군대에 머물고 있는 자식을 들여다보지 않는 부모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자식의 죽음은 너무나 안타깝지만 현충원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부모님은 알고 있지 않을까? 혹시라도 부대에 찾아오면 집으로 가져가라고 할까 봐 겁이 나서 못 들여다보는 것은 아닐까?
시립화장장 견학을 다녀와서야 봉안소를 어떻게 리모델링해야 할지 정확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박상사와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만들기로 하고 도면을 그렸다. 봉안소 내부에서 작업을 할 수가 없었기에 최대한 밖에서 만들어서 내부로 옮기는 것으로 계획을 했다. 조용하고 은밀하게 정예요원들을 데리고 박상사가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이 절반정도 진행되었을 무렵 내가 다 책임지겠다고 큰소리 뻥뻥 쳤지만 대장님께 보고 안 드리고 있는 것이 굉장히 찝찝했던 터라 살며시 내려가서 말씀을 드렸다.
"충성! 대대장님, 중대원들이 후문 근무 못 서겠다고 마음의 편지도 많이 쓰고 뭔가 조치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해서 봉안소 리모델링을 하는 중입니다. 다 정리되면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봉안소까지 정비할 시간이 있어? 중대 바쁠 텐데? 뭐, 중대장이 알아서 해."
제일 편하기도 하지만 어렵기도 한 말이 '알아서 해'이다. 너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도 너의 몫이라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