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맞는 그해 겨울의 서설

by 최익석bomiromi


1.

“"이상하지, 눈은. 어떻게 하늘에서 저런 게 내려오지."

눈 내리는 벌판이었다.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가 마치 묘비처럼 등성이까지 심겨 있었다. 그 앙상한 능선을 따라 끝없이 눈이 내렸다. 이상하지, 눈은. 어떻게 하늘에서 저런 게 내려오지, 나는 생각하며 서 있었다. 발밑에서 희고 가는 꽃들이 피어났다. 꽃잎일까, 눈송이일까. 분간할 수 없었다. 그건 꿈이었다. “

한밤증 눈 내리는 속초항(동명항)

작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첫 문장에서부터 ‘눈’으로 시작한다. 이후 작품 속에서 내내 눈은 ‘그치지 않고’ 등장한다. 눈은 단순한 풍경 묘사나 자연현상을 그리는데 ‘그치지’ 않는다. 작품 속 인물들의 깊은 상실과 트라우마, 삶의 의지 등 내면을 드러내는 중요한 모티프로서 주제와 직결되는 소재로서 작동한다. 눈을 동원한 사유 중에는 작품의 배경인 제주와 한라가 눈과 관련된 깊은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이기도 하겠다.


또 다른 대표작 <소년이 온다>의 시작이 ’ 비‘로 시작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비가 올 것 같아.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 역시 작품 속 중간중간에 비는 중요한 장치로서 수시로 동원되는 것을 보면 한강 문학 속에서 눈과 비는 문학 재료로서 특별한 함의를 갖는 듯하다.


2.

눈은 기본적으로 순수한 물(H2O)의 육각형 대칭 결정체이다. 따뜻한 공기가 상승하면서 냉각되면 수증기가 응결되어 작은 물방울이나 얼음 결정이 되는데 이 얼음결정이 곧 눈이다. 하나의 산소와 수소 원자 두 개가 약 120도의 결합 각도를 이룬다. 대기 중의 먼지, 작은 꽃가루 등 미세한 입자들이 빙정핵 역할을 하는데 이 빙정핵에 계속하여 수증기가 달라붙으면서 다양한 형태의 눈 결정으로 성장하며 지상으로 떨어진다.


눈은 나뭇가지나 벼락, 해안선 등 자연에서 흔히 발견되는 프랙털 구조를 지닌다. 부분과 전체가 닮는다는 자기 유사성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육각형의 대칭구조는 눈 결정 성장 과정에서도 유지되며 끊임없이 분기, 복잡한 구조를 이루지만 매우 안정적이다. 물리적, 화학적, 수학적으로 완벽하리만큼의 아름다움을 지닌다.


눈 결정 내부는 텅 비어있다. 따라서 소리를 흡수하는 성질을 지닌다. 특히 함박눈이 내리는 날은 주변이 조용해지는 효과가 나타나는데, 작가 한강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이를 자세히 묘사하며 눈 내리는 버스 정류장의 적막한 광경을 흑백의 수묵화로 표현한다.


3.

경영학자이자 클래식 가곡 작곡가인 김효근(얼마 전

KBS 라디오 클래식 방송에 출연한 그는 자신의 작품을 아트팝이라 평했다)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은 <눈>이다. 서울대 경제학과 3학년(그러고 보니 동갑내기다.)이던 1981년 제1회 MBC 대학가곡제에 출전해 유일한 비전공자임에도 대상을 받았다. 금상을 발표할 때까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길래 떨어졌는 줄 알았더란다. 대학원에선 경영학으로 전환, 피츠버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저명한 경영학자로서 역량을 발휘해 오면서도 작곡가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있다. 위 방송에 출연해서 이르기를, 초등생 시절 아버지가 사준 피아노에 매료, 음대에 진학하려 했으나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윤수영 아나운서가 “공부를 워낙 잘하셔서”라고 추임새를.)로 경제학과로 진학했다고. 그의 대표작들은 <눈> 외에도 공히 모두 널리 애창되는 서정성 깊은 명곡들이다. <첫사랑>, <미별(아름다운 이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리고 세월호 참사로 더 널리 불린 <내 영혼 바람되어> 등등.


“조그만 산길에/흰 눈이 곱게 쌓이면

내 작은 발자욱을/영원히 남기고 싶소

내 작은 마음이/하얗게 물들 때까지

새하얀 산길을/헤매이고 싶소“(<눈> 부분)

김효근 <눈>(노래 조미경), 1981, 제1회 MBC 대학가곡제

<눈>을 음미하다 보면 멜로디도 멜로지이지만 가사의예쁨에 더 깊이 빠져든다. 오늘 밤, 그러다가 ‘산길’ 부분에서 갑자기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노래한 김현성의 동명의 노래로 튀어버렸다. 아니면 어쩔 것인가. 창밖엔 이미 저리 눈이 쌓였으니.


“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오막살이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흰 당나귀> 부분)

백석 탄생 100주년 기념 음반, 김현성


4.

어제 늦은 밤부터 ‘서설’이 강풍과 함께 대차게 내렸다.산맥동편 마을을 중심으로 더더욱. 양력 삼월 초이튿날에 서설이라니. 올겨울(이라 쓰고 지난겨울이라고 해야 할 판이다) 내내 눈이라곤 구경도 못해본 이곳 항구 마을이다. 그러더니 한 번에, 길거리에 세워진 자동차 위에 쌓인 눈을 보니, 좋이 30cm는 되는 눈이 내렸다.

척산온천 주변의 자동차

”산골로 가는 것은/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흰 당나귀> 부분)라며 맘먹고 시작한 지방살이다.(행여나…) 그 첫해부터 눈 구경 한번 못하고 겨울을 나는 모양이라고 겨우 내내 툴툴대던 나였다. 간절하면 통한다던가. 하늘은 무심치 않아 이처럼 많은 눈을 내려주셨으니 이도 부족하면 오늘 밤도 또 내일도 내려주시겠단다. 오늘은 약소하게(?) 동네 주변만 마눌 손잡고 쏘다녔으되 내일은 눈발을 헤치고 멀리 한계령까지 내달려볼 참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아내를 사랑해서

오늘 밤도 푹푹 눈은 나릴 것이다.

눈이 나릴 것이다, 나릴 것이다.‘

델 피노(Delpino), 울산바위 최애 뷰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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