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쁨에 감사.
벗에게.
한동안 게을리했던 개인 운동을 최근 재개했습니다. 가끔, 이따금씩 생각날 때마다 하던 운동을 루틴한 매일(Daily) 운동으로 다시 다잡은 거죠. 전적으로 브롬토너(Bromptoner) 중심의 모임 덕분입니다. 2년 여 전에도 함께 했던 그들입니다. 지역살이 중 소명으로 받아 수행하던 봉사 미션도 종료되었던 참입니다. 시간적 여유가 생긴 셈이죠. 운동은 아팟 단지 내 휘트니스 센터에서 하고 있습니다. 고마운 일이죠. 이런 시설을 집 안에 두고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은. 최소한의 정해진 운동량을 완수한 다음 그 결과(운동 횟수)를 단톡방에 자율적으로 올립니다. 아무도 참견하지 않으며 ‘실패’했더라도 또한 아무도 탓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과의 약속을 흔들림 없이 지켜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오늘 오후 운동을 마치고 나오는데 강풍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바람의 도시'임을 절감합니다. 정말 심할 때는 몸이 두웅둥 뜨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웬만한 아이는 날아갈 수도 있겠구나 싶을 때도 많죠. 오늘도 따악 그랬습니다. 야심한 시각인 지금, 창밖을 내다보니 조금 잦아든 듯은 합니다. 대신 어둠 속 도로에 살짝 윤기가 도는 것이 그사이 미량의 비가 내린 듯하군요. 예보에 의하면 산간에는 눈이 나린다 했습니다. 건조주의보가 내렸던 참이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런 밤이 지나고 나면 내일은 또 내일의 밝은 해가 뜰 것입니다. 구름 없는 잔잔하고 평화로운 수평선 위를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기대합니다.
작가 공지영(마리아)은 자신이 기쁨을 느꼈을(느낄) 때를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하더군요.(가톨릭신문, 2025.12.7)
첫 번째는 회심을 하고 다시 믿음을 되찾은 날. 즉, 다시 하느님을 받아들였을 때. 두 번째가 진실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을 때. 그리하여 수많은 눈물을 흘리고 용서를 빌었을 때. 세 번째는 아주 약간 남에게 도움을 주었을 때. 그리고 가끔 기도해 주었는데 그 남이 정말로 수렁에서 벗어나 잘 되었을 때.
그녀는 좋은 것과 기쁜 것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좋은 것(때)은 많을 수 있지만 기쁨을 느끼는 때는 많지 않다고 하는군요. 공감합니다.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정말 '기뻤을 때'가 얼마나 될까 되짚어 보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듯합니다. 두 아이를 엄마의 뱃속에서 받아 들던 때가 첫 번째, 두 번째 손가락에 꼽히겠습니다. 바로 엊그제 일 같기만 합니다. 그 이후로는? 글쎄요. 삶은, 인생은 고해이므로 기뻤을 날이 그닥 많지 않을 것임은 비단 소생만은 아닐 것입니다.
넷플릭스 영화 <기차의 꿈(Train Dreams)>은 지독히도 구슬픈 영화입니다. (스포 있음)
외롭고 쓸쓸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습니다. 등장인물이나 스토리 자체는 픽션이지만 시대적, 장소적 배경, 사건. 사고 등 서사의 내용은 팩트였음직한 영화죠. 천애의 고아인 그레이니어(조엘 에저튼 분)는 자신이 누구에게서,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자신의 몸 하나에만 의지한 채 벌목공으로, 철도 공사 현장 노동자로 근근이 살아가죠. 아이다호 주(州)를 중심으로 동서로 떠돕니다. 우연히 교회에서 글래디스(펠리시티 존스 분)를 만나 사랑을 하고 이내 가정을 꾸미고는 아기(케이티)를 낳습니다. 아내와 아기가 그레이니어의 전부가 됩니다. 가족이 그의 '우주'가 된 것이죠. 일자릴 찾아 부랑하는 고된 육체 노동자이지만 집(가족)으로 돌아와 아내와 아기와 함께 하는 공간과 시간만큼은 그에게는 천국입니다. 그 천국을 그는 대화재로 상실합니다. 그 고통은 지옥에 다름 아닙니다. 아내와 아기가 어디엔가 살아 있을 것 같아 세상을 찾아 헤매게 되죠. 가족을 찾아다니는 외롭고 쓸쓸한 그레이니어를 지켜보는 관객에게 그 고통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영화는 대부분의 장면을 대사보다는 배우의 표정으로, 우거진 원시림을 중심으로 한 자연으로, 그리고 그 자연 속의 소리(특히 새소리, 풀벌레 소리)로 표현합니다. 고독과 상실의 아픔은 고요함 속에 더더욱 뼈저리게 전해집니다.
벌목 노동자의 삶은 떠도는 삶입니다. 20세기 초반의 미국이긴 하지만 야만이 횡행합니다. 살인은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고 몸이 전부인 무지하기 짝이 없는 무력한 노동자들은 무방비로 폭력에 스러집니다. 그레이니어는 함께 일하던 젊은 중국인 노동자가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게 철길 다리 위에서 던져지며 죽임을 당하는 광경을 보고 트라우마에 빠집니다. 이후 평생 그 환시, 환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두 번 만나기 어려운 벌목 현장에서 천재일우로 다시 만난 늙은 벌목공 아른(윌리엄 H. 머시 분.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얼굴이 익숙한 배우. 보는 순간, '아~, 이 양반!' 하게 되는 인물)은 수백 년 묵은 나무들을 베어내는 것이 못내 가슴 아픕니다. 인간과 나무와 모든 생명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그레이니어에게 일러줍니다. 작업 중 사고로 죽음을 맞죠. 그리고는 자연 속으로 그들과 ‘얽혀지고‘, '연결'되며 사라집니다.
수십 년이 지난 후 어느덧 1960년 대 후반. 그레이니어는 이미 늙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고 일상을 버텨오는 중에 세상도 바뀌었죠. 그런 세상 속 어느 날, 여전히 가난한 그는 관광용 글라이더 비행기 속에 앉아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수시로 뒤집어지는 것을 보며 그는 생각합니다. 하늘과 땅이, 그리고 온 세상이 서로 완벽히 연결되어 있다고. 어디에선가 함께 숨을 쉬고 있을(것만 같은) 아내 글래디스와 딸 케이티가 그의 눈 속에 담겨 있는 듯도 합니다. 조만간 그는 가족과 연결될 것임을, 아니 이미 연결되어 있음을 관객은 압니다.
얼마 전 '뿡알칭구'들과 고향에서 오랜만에 모임이 있었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한 번은 얼굴들을 봐야 했겠죠. 1년 만에 이들과 통음을 했습니다. 동편마을로 돌아오는 버스에 어찌 올랐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눈을 뜨니 한밤 중 포구의 버스터미널이었죠. 마눌이 보기에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 있었고, 어찌어찌 간신히 침대에 몸을 눕힌 것 같았는데 눈을 뜨니 다음날 아침이더군요. 두통 속에 간밤의 행적을 복기해 보니 무탈한 것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이 나이 먹어서도 아직까지 철이 들지 않았음을 깨달았죠. 여적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기도 했습니다.
4세기 초중반의 이집트 사막의 그리스도교 독(獨)수도승들인 사막교부(Desert Father)들이 말했답니다.
'오늘을 살아라!'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한 시의 한 구절인 '오늘을 잡아라(Carpe Diem)'와 다름 아닐진대, '현재를 충실히 살아라'라는 뜻일 겁니다. '지나간 과거에 저당 잡히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걱정을 가불 해서 살지 말아라'라는 의미이기도 하겠죠.(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가톨릭신문(2025.11.23) 글에서 차용)
매일 아침, 잠에서 눈을 뜨고 살아있음을 확인할 때마다 기쁨을 느낍니다. 발코니 창문 밖에서 떠오르는 해가 망막에 잡히게 되면 더더욱 기쁨을 느끼게 됨은 물론 또다시 오늘 새날을 살 수 있게 허락해 주신 하늘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이 순간, 소생이 이 우주에 오로지 홀로 던져진 외로운 존재가 아닌, 이 새벽 거실에서 바시락 바시락 꼬물 거리는 마눌이 있고, 이따금 수시로 페톡으로 얼굴과 목소리를 전해오는 바다 건너 아이들이 있음을 깨닫는 이 순간, 상실의 존재 그레이니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공지영의 그것과는 또 다른 기쁨이 충만한 존재임을 또한 확인하게 됩니다.
평안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