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자각 - 문제는 나한테 있었다.
2-3) 0.1톤 몸관리 안 하는 여자(몸문제)
어릴 때부터 식탐이 있었다. 밥그릇을 뚝딱 비우고는 ‘엄마 밥 더 줘’를 외치던 아이였다. 시도 때도 없이 배가 고파 집에 먹을 게 없나 살피고 다녔다. 그런 내가 늘 챙겨보던 것은 전단지였다. 집 앞에 붙여있는 전단지를 보면 미소를 지으며 반가운 손님처럼 대하며 집으로 가져왔다. 백화점 전단지 뒷면에는 닭다리, 피자, 수박 등 먹음직스러운 식품이 한눈에 펼쳐졌고 그걸 본 순간 입에 침이 고였다. ‘엄마! 이거 맛있겠다.’ 내가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거!’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엄마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원하는 만큼 음식을 사줄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원하는 음식을 배불리 먹지 못한 것은 일종의 결핍이 되었다. 해소되지 않는 식욕을 어떻게든 채우려 했다. 거리를 걸으면 슈퍼나 떡볶이 포장마차부터 눈에 들어왔다. 텔레비전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tv를 보면 아이들이 학교에 다녀와서 엄마가 간식을 챙겨주는 모습을 보았다. 영상 속의 아이가 부러웠다. ‘나도 저런 간식을 먹고 싶어!’ 뭐라도 먹고 싶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냉장고의 김치를 퍼 먹고, 음식의 양념이었던 깨소금을 먹었다. 분풀이를 하듯 먹고 나면 무언가가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남아선호사상이 있던 시절, 어쩌다가 과자가 생기면 여동생과 나는 1개를 나눠 먹고, 남동생은 아들이라서 1개를 독차지했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상했다. ‘먹기 싫어’라는 말은 2명의 경쟁자가 있는 통에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도 먹고 싶어.’라는 간절함이 늘 작동했고, 식욕을 충족하는 것이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 되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에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이 드러나면서 밖에서 말 못 할 고민이 생기거나 마음이 힘들면 폭식으로 내면의 공허함을 채웠다. 처음부터 소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의 요구에 따라 당시에 유행하던 나미 춤을 추면서 어른들에게 웃음을 주는 기특한 면도 있었다. 교도관 아버지의 강압적이고 무서운 성격에 주눅이 들어서 ‘네’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던 가정환경이라 점차 성격이 변해갔다. 가정은 무조건적인 순종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를 원하거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유치원을 다닐 때 동네 20대 아저씨가 예뻐해 주는 거라고 생각했던 행동이 성추행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마음속 분노가 커졌다. 하지만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고 믿지 못해서 음식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점점 더 뚱뚱해지니 밖에서는 ‘내가 원래 잘 안 먹는데 살이 찐다’라는 식의 억울한 척을 하기 위해 음식을 끄적끄적해 댔고, 집에 와서는 양푼에 밥을 잔뜩 비벼서 우걱우걱 먹어댔다. 여름철에 버스를 타서 의자에 앉으면 항상 허벅지 양쪽의 살이 한가득 겹쳐서 땀이 생겼다.
몸에 커다란 변화가 오게 된 때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을 하기 전 방학을 보내면서부터였다. 임대아파트에 살다가 초등학교도 6학년 때 전학을 가게 되었고 근처에 사는 친구가 없었다. 중학교 1학년을 준비하며 방학 2개월간 다녔던 수학 학원에서 소극적인 성격인 탓에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어디에 사는지 말하기가 창피해서 조용히 수업만 듣고 돌아오곤 했다. ‘쥐가 나오는, 푸세식 화장실인, 월세로 살고 있는 집’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2개월의 방학 동안에 빈둥빈둥거리면서 집안에서 뒹굴거리다 보니 움직이는 양보다 먹는 양이 많았다. 10kg이 순식간에 찐 상태가 되었다. 가족들은 그런 나를 ‘돼지’라고 불렀다. ‘난 뚱뚱하니까 돼지가 맞아’ 그렇게 스스로를 돼지라고 여겼다. 비웃음과 빈정거림이 싫었지만, 가정에서 존중과 위로를 하는 가족문화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돼지’ 그 단어를 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 순간, 날씬해질 거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날씬한 사람들은 tv속에 나오는 연예인이라고 단정 지었다.
몸매에 자신이 없다 보니 옷가게는 가지 않았다. 나의 비대한 몸과 마주해야 하는 거울을 보면 주눅이 들었다. 몸매로 인해서 옷을 고르는 것에 대한 제약이 없었던 때도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엄마랑 옷을 사러 가면 여러 차례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이거 입어봐, 이것도 입어봐. 아니 아니~ 다시 이거~’
넉넉하지 않은 주머니사정에서 딸에게 잘 어울리고 꼭 맞는 옷을 입히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을 모른 채, 옷을 여러 번 갈아입으라고 하는 그 시간이 귀찮기만 했다. 할인을 많이 하는 상품 또는 유행에 뒤처진 옷을 입어야 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한 좋은 구실이었다. ‘나는 옷 사는 걸 귀찮아해.’ 백화점에서 뉴시즌 옷을 입어보는 것이었다면, 나는 옷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몸꽝이 되면서는 보물찾기 하듯이 사이즈에 맞는 옷을 찾아야 하는 행위가 하고 싶지 않았다.
tv에서 먹고 싶은 빵을 먹기 위해서 운동을 한다는 사람을 보았다. ‘귀찮은데 어떻게 운동을 하지?’ 나도 큰마음먹고 운동을 했다. 집에서 스트레칭을 하거나 동네 운동장 한 바퀴를 돌았다. 후후. 운동을 하면 심장이 타들어갈 듯이 뛰면서 얼굴의 양쪽 볼이 붉게 타올랐다. 몸에 피가 돌고 호흡이 빨라지고 에너지가 소모되는 현상일 테지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그 느낌이 싫었다. 운동 후 땀을 흘리고 난 뒤 샤워를 하면 바깥의 공기가 시원하고 상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상쾌한 느낌보다 양볼의 뜨거운 화끈거림이 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 화끈거림은 고작 한 시간 남짓이면 가라앉았지만, 순간적인 불편함은 운동을 회피하는 하나의 구실이 되었다. ‘운동은 불쾌해 ‘ 얼굴에서 일어나는 발열은 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했다.
내 얼굴피부는 춥거나 더울 때 양볼이 빨개졌다. ’ 촌놈촌년병‘이라고 하는 이 증상은 가뜩이나 하기 싫은 운동으로 도드라지는 것이 싫었다. 운동하는 목표가 뚜렷했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꾸준한 운동으로 원하는 몸매를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그렸다면 어땠을까? 그런 몸으로 도보를 경쾌하게 활보하거나, 등산을 즐기거나 하는 일상을 꿈꿨다면 어땠을까? 나를 아끼고 사랑하며 사는 법을 알아가며 살지 않았을까? 맛있는 걸 먹고픈 욕구는 강했지만, 원하는 자아상이나 삶의 모습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혼 후, 첫째 아이가 생겼다. 임신 7주에 몸무게는 78kg 정도였다. 34주 무렵에 양수가 터져서 첫째를 출산했을 때 마지막으로 쟀던 몸무게는 92kg, 0.1톤에 가까운 수치였다. 아마도 40주를 채웠으면 0.1톤을 찍었을 것 같기도 하다. 숨 쉬는 것도 힘들었고,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다. 식탁이 아닌 밥상을 펴야 하는 생활을 했는데, 좌식이라 자주 앉아 있다가 일어나야 했다. 육중한 몸을 뭐라도 붙잡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물건이 없었다. 손으로 바닥을 짚고, 무릎을 딛고 일으켜 세웠다. 사방에 퍼진 살들을 출렁이며 겨우 일어났다. 거대해진 몸은 일상을 둔하게 만들었다. 먹기, 집 치우기, 자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소란을 피하고자 했다. 태교로 명화 그리기를 했었는데, 1시간 정도 색을 칠하면 배가 땅겨서 지속하기 어려웠다.
’ 운동하셔야 합니다.‘
산부인과 의사의 말도 있었지만, 겨울철에 임신을 하여 혹여나 빙판길에 넘어질까 싶어서 더욱 움직이지 않았다. 8년 만에 아이를 가진 터라 조심한다는 핑계로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걷게 되면 걸을수록 숨이 찾고, 땀에 몸이 젖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시간. 무료함에 동네 공원을 한 바퀴 걷다가 집에 들어갔다. 유리문을 열어서 복도를 지나가야 했는데, 유리문으로 비친 내 모습이 마치 커다란 공처럼 보였다. ’ 굴러갈 수 있겠다.‘ ’ 라인이 없네.‘ 뚱뚱하다는 건 겉으로 보기에도 부담스럽다. 이게 나였다니. 살이 찐 것 알았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나는 출산을 핑계로 나의 비만을 무한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 창피해. 아무리 임산부라고 하지만..‘
거대한 몸을 가진 나 자신이 싫어졌다.
몇 달 후 출산을 했다. 양수가 터지고 아이가 몸 밖으로 나오긴 했다. 얼마 지나 부기가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몸의 육중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활기차고 가벼운 일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육아와 가사 일로 지쳤다는 핑계를 둘러대고 싶지는 않다. 내가 나를 아끼고 돌보지 않을 때 발생하는 일은 생각보다 가혹했다. 어느 날, 주말에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다. 낮부터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남편은 내가 물어본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시비를 걸어댔다.
’ 그것도 기억 못 하냐?‘ ’ 그래! 기억 못 해서 미안하다!‘
감정이 상해서 퉁명스럽게 나간 답변에 돌아온 것은 주먹질이었다. 머리를 세게 2번을 맞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무장갑을 낀 채로 도움을 요청하러 시어머니에게 달려갔다. 다급하게 맨발로 뛰어갔지만, 돌아온 답변은 ’ 너도 똑같이 때려 ‘였다. 내가 맞았다고 해도 주먹질을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이 집에 못 있겠어요. 어머니.”
이렇게 얘기하고 차 키를 챙겨서 허겁지겁 집을 빠져나왔다. 고개를 숙인 채, 이 모든 상황을 모른 척하고 있는 3살 아들을 뒤로한 채로. 휴대폰과 차키가 전부였던 터라 당장 쓸 돈이 필요했다. 아산에 있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서 서울에 있는 혼자 사는 지인 집으로 갔다. 머리를 얻어맞은 통증과 생리통으로 몸이 불편했다.
“언니, 좀 쉬어.”
물밀 듯 밀려오는 서러움과 창피함으로 3일 밤낮을 잠만 잤다. 3일 뒤 정신을 차리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거울을 보았다. 생리기간이라 몸은 퉁퉁 부어있었고, 웬 우울하고, 뚱뚱한 여자가 서 있었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것 같지 않구나!’ 나조차 나를 돕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니 사람들이 내가 맞은 것을 당연하게 여길 것만 같았다. 자신을 방치한, 무방비 상태로 살아온 사람의 몸이랄까.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달라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