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자각 - 문제는 나한테 있었다.
2-6) 퇴직금 받아본 적 없는 여자
23살, 주머니에 가진 돈은 11,000원. PC방에서 구인사이트를 검색하고 이력서를 보냈다. 1시간에 1,000원 사용료를 내고, 이제 남은 돈은 만 원.
‘만원이면 10번은 이력서를 내는 시도를 해볼 수 있어.’
마음은 ‘언제 취업이 될 수 있을까 ‘ 하는 생각에 불안에 떨었고, 빨리 일을 해야 한다는 두려움에 불편했지만, 애써서 10번이나 남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대전은 6대 도시에 들어가는 광역시였지만, 내놓으라 하는 대기업이 없어서 그런지 일자리가 많지 않았다. 10번의 시도 안에 일자리가 구해지면 지불해야 할 교통비도 필요했지만, 다른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 일을 구해야 한다.’
오로지 이 생각뿐이었다. 대전을 포함하여 서울에도 이력서를 냈고, 다행히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 서울에 있는 중식레스토랑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면접보기 전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친구가 대전에 왔다고 만나자는 연락이 왔고, 친구를 만나서 상황을 이야기했다.
“내일 서울 중식당에 면접이 있는데, 차비가 없어.”
“30만 원 빌려줄게.”
“중식당에 합격해도 지낼 곳도 없는 상태야.”
“기숙사에서 같이 지내자. 곧 졸업하니까 졸업 이후엔 방 하나 구해서 같이 지내면 될 거야.”
친구의 도움으로 서울에 면접을 보러 갔고, 나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면접 당일날 바로 취업을 할 수 있었다. 취업한 중식당은 양재에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1번 출구에 내려서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2층으로 된 큰 식당 건물과 주차장이 넓게 구비되어 있는 곳이었다. 음식을 만드는 주방에는 메인 주방장과 보조 주방장, 서브하는 사람도 2명은 있었고, 모두 하얀색 유니폼과 모자를 쓰고 있었다. 식당은 1층에 테이블이 10개, 2층에는 연회석으로 단체모임을 할 수 있는 홀과 룸이 3개가 있었다. 테이블에는 빨간색 받침 위에 잘 접어서 예쁘게 놓인 냅킨과 컵, 수저 세트가 보였다.
“지하에 내려가면 유니폼이 있어. 거기서 맞는 옷을 입고 올라와.”
머리카락은 뒤로 묶어서 검은색 망이 달린 핀으로 가렸다. 음식을 담는 그릇은 모두 사기로 되어 있었는데, 자장면 담는 그릇은 무게가 제법 나가는 사각형으로 된 그릇이었다. 면접을 본 시각은 오전 10시였고, 점심시각에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일을 시작했다. 냅킨을 접는 방법을 배우고, 테이블마다 세팅해야 하는 물품들을 익혔다. 예약된 단체손님들을 위해 2층에 단체테이블 세팅하는 방법과 화장실 청소 등을 하나씩 배웠다. 시간이 가장 많이 걸린 것은 중식레스토랑에서 판매하는 중국술과 와인 몇 종류들의 도수와 금액을 외우는 일이었다.
“이건 몇 잔 정도 나오나?”
마셔본 적 없었지만, 손님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에 일이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걱정해야 했던 것은 있었다. 바로 기숙사에 들어가는 일이었다. 서울대는 점호가 없었다. 하지만 기숙사에 들어가려면 카드키가 있어야 했는데, 이 카드키는 복사가 되지 않았다. 퇴근하고 지하철을 타고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이동하면서 매일매일 기도를 해야 했다.
‘하나님, 오늘도 기숙사에 기다리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다행히 마을버스에서 내려서 기숙사에 걸어가는 동안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들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뒤따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숙소에 도착하면 항상 감사했다.
‘일할 수 있으니까. 들키지 않고 안전하게 잠잘 수 있는 곳에 있으니까’
급여는 4대 보험 없는 100만 원. 급여날이면 현금으로 만 원짜리 100장이 든 급여봉투를 받았다. 2개월간 기숙사에서 지내다가 친구가 졸업을 하게 되면서 우리는 신림에 옥탑방을 하나 구했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30만 원. 두 사람이 누우면 움직일 공간이 전혀 없이 꼭 맞는 곳이었다. 옥탑이라서 밖을 나가면 서울시내 모습을 볼 수 있는 장소였다. 이사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이제 매일밤 밖에서 누군가가 들어가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라는 안도감과 제일 친한 친구가 룸메이트로 있어서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감사했다. 3개월이 지나고 운이 좋아서 매니저가 되었다. 급여는 5만 원이 올랐다. 3년 동안 일을 했던 매니저언니가 그만두면서 기존에 선임자들이 있었지만, 매니저로 된 것은 ‘운이 좋아서’였다. 하지만 예상보다 적은 급여상승에 한숨이 나왔다. 매달 버는 급여로 안정적으로 돈을 모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대전 본가는 경매딱지가 붙어 있었고, 어느 날 연락온 전화에서는 가족이 구매를 해야 저렴하게 살 수 있다고 하면서 경매물건 살 돈을 보내달라고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는 교통사고가 나기도 했다. 돈을 모을 수 없는 문제들이 ‘불운 맛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문제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이건 내가 일을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야!’
105만 원의 급여로는 답이 보이지 않았다. 6개월 정도 일을 하고 첫 직장이었던 중식레스토랑을 그만두었다. 빈 주먹이 내게 있는 전부였다. 두 번째로 구했던 일은 요르단에서 여행사 사무직을 하는 것이었다. 1년을 일했지만, 역시 퇴직금은 없었다. 매달 꼬박꼬박 급여를 받기도 어려웠던 회사여서 퇴직금은 기대하지 않았다. 이후로 10년 프리랜서 여행가이드 일 역시 4대 보험과 퇴직금은 없는 안정감 없는 일자리였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일자리 공고 사이트마다 인턴이라는 제도 또는 기간제 근로라는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해고할 수 있는 일자리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듯 보였다. 보은에서 출산 후 처음 가졌던 일은 기간제 근로였는데, 7개월 기간제 근로 중에서 1월부터 5월까지 근무를 하고, 다시 11월부터 12월까지 일을 하는 자리였다. 그마저도 일자리가 없는 곳이다 보니 ‘일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만족했다.
얼마 전, 중소기업에 취업을 했다. 전임자가 4년 동안 근무를 해서 퇴직금으로 천여만원을 받는 것을 보게 되었다.
‘퇴직금을 주는 곳도 있구나!’
왠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안정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일자리’에 계속 있다 보니 그 세계가 전부인 줄 알았던 상태였다.
‘퇴직금을 받고 싶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저 안정되게 꾸준히 일하고 싶은 사람이 더 많지는 않을까?’
지금 내가 하는 일로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다면, 좋아하는 취미생활 하나 정도, 건강관리를 할 수 있는 운동 하나와 약간의 저축을 할 수 있고 부채 없는 안정적인 집 하나에서 지내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소망이 아닐까? 우리가 부업을 찾고, 다른 일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것은 지금의 급여로는 올라가는 물가상승을 따라잡을 수 없고, 퍽퍽한 주머니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도 1년을 일을 하면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일을 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회사는 나를 책임져주는 것이 아니다. 언제라도 내가 쓸모없어지면 다른 소모품을 대체하듯이 나 역시 대체될 수 있음을 안다. 그래서 스스로를 책임지려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1년을 채우기 전에 급여보다 더 많은 인세와 강연료를 받아서 1인 창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쁜 커피숍에서 노트북 하나를 켜고 글을 쓰면서 누군가에게 ‘다른 세계가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