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간 더 이상 졸음을 참지 못하고 낮잠을 청했다. 눈을 뜨니 음악소리 없이 사방이 고요하다. 배송시간에 대해 더 이상 연락이 없었고 다행히 오늘은 늦더라도 꼭 배송을 올 모양이다. 주문제작한 동축스피커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어림잡아 4개월은 된 것 같다. 원래는 한 달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는데 기일이 지켜지지 않아 이제야 받게 된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디자인을 해서 넘기고 기다리는 내내 즐거웠다. 거실 양쪽 가장자리에 놓일 커다란 원 하나가 심플하게 들어가 있는 스피커의 위엄을 생각하며 들떠 있었다. 2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부터 스피커회사 측에서 배송이 늦어진다고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제품을 업그레이드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면 안 되겠냐는 요청이었다. 당연히 업그레이드된 제품을 받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으니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처음의 상태 그대로 판매할 수도 있었는데 제품의 부족함을 채워서 출고하고 싶다는 마음에 감사하며 기다렸다. 같은 요청을 세 번인가 네 번을 더 받았고 이제야 스피커는 집으로 배송되어 온다.
좋은 스피커를 좋은 사람을 통해 만나다.
배송은 많이 늦어졌지만 한 번도 짜증이 난 적은 없다. 그 회사의 오너이자 기술자인 사장님은 다방면의 음악을 잘 이해했고 제품에 대한 열정이 굉장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얗고 선해 보이는 얼굴에 키가 크고 깡마른 모습으로 거의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분이구나 짐작했다. 그는 30년을 같은 업에 종사했고 자신의 이름으로 된 회사에서 몇 년간 노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전에는 이름이 알려진 오디오 회사에서 제작하는 일에 근무했다고 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소리를 만들고 싶어서 독립을 한 것이다. 멋진 인생을 사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쉬지도 않으시고 힘들지 않으세요?' 물으니 '쉬는 건 나중에 하죠 뭐. 갈길이 멀어서요.' 하며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겸손한 그의 태도에 나까지 겸손해지는 기분이었다.
처음에 주문을 하러 회사에 가보니 자재인지 쓰레기인지 모를 물건들이 사방에 널려져 있었다. 직원 한 명만이 뒷모습을 보이며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사장님은 앉아있을 곳도 마땅치 않아 서성대는 내가 신경이 쓰였는지 이것저것 제작해 보는 연구실로 이용 중인 곳이라 좀 어수선하다고 했다. 결국 선채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한두 번 왔다 갔다 하더니 보고 싶어 하는 스피커를 찾아 들려주었다. 음폭이 넓고 중음이 좋은 라이브 연주를 듣고 있는 것 같은 생생함이 스피커에서 터져 나왔다. 스피커 디자인이 예쁜 다른 몇 개도 더 들어봤지만 선택한 스피커만 한 매력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듣는 중간중간 소리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 선택한 스피커의 장점이나 제대로 듣기 위한 공간의 사이즈나 함께 선택하면 좋을 엠프는 꼭 비쌀 필요 없다는 설명까지 세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공간은 뒤뚱거리며 걸어야 할 만큼 물건으로 가득 차고 좁아 정신이 없었지만 그의 설명은 경청하기 좋은 목소리 톤으로 내용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소리와 함께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은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디자인, 컬러 무엇이든 좋다고 했다. 그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을 퍼부었다. 제시한 판매가격에는 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도 일반 동축스피커보다 가격이 많이 저렴했다. 좋은 음질의 스피커에 내가 원하는 도안이 가능한데 가격까지 좋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완불로 계약을 마쳤다.
물건을 살 때는 물건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나는 판매하는 사람의 태도나 인성이 중요하다. 손님이 왕일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물건에 대한 자신감, 정보, 가치는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매장을 가면 달달 외운듯한 몇 마디를 하고 나면 아는 것이 없는 직원을 만나는데 성의 없는 태도에 그냥 돌아서 나오게 된다.
손님을 대하는 친절은 바른 인사의 격식을 갖추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실망하는 것은 전문성이 없는 직원의 태도이다. 비싼 가격의 물건일수록 돈이 쓸모없이 쓰이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도안이 잘 들어갔는지 소리는 더 좋아진 건지 곧 도착할 스피커가 너무 기다려진다. 지금도 교통체증으로 늦어지는 것이 너무 미안한지 오는 중이라고 계속 문자를 보내오고 있다. 거의 다 왔다는 마지막 문자를 받았으니 곧 벨이 울릴 것이다. 기대감 때문에 긴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