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주 이야기
은주는 5층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 앞까지 갔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버튼 위에 손을 얹었다가 떼는 동작을 몇 번이나 했다. 눌러도 문이 열리는 것뿐인데, 그 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에 비칠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계단이었다. 다리가 아파도, 숨이 가빠도 계단이 나았다. 계단에서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됐다. 시선을 바닥에 두고, 발만 보며 오를 수 있었다. 발걸음이 계단에 닿을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일부러 발을 세게 디뎠다. 누군가 안에서 이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길 바라는 마음과, 아무도 듣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있었다.
머릿속엔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벨을 누를까 말까.
정말 있으면 어쩌지.
‘있다’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은주는 끝까지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여자가 있을 수도 있고, 아이가 있을 수도 있고, 아무도 없을 수도 있었다. 아무도 없는 쪽이 더 잔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은주는 계단 난간을 꽉 붙잡았다. 손바닥에 차가운 철의 감촉이 전해졌다. 손에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 자신이 쓰러지지 않았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5층에 도착했다가 다시 내려왔다. 한 층 내려갈 때마다 숨이 더 가빠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 심장 박동이 두려움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남아 있는 욕망 때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층계참에 멈춰 서서 잠시 눈을 감았다. ‘확인만 하자.’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확인만 하고 돌아오면 된다고. 그 이후의 일은 그 이후의 은주가 감당하면 된다고.
문 앞에 섰다. 벨 옆에는 손때가 묻어 반들거리는 초인종 커버가 달려 있었다. 수없이 눌렸을 버튼. 그 위에 자신의 손이 올라가는 순간, 은주는 손끝이 떨리는 걸 느꼈다. 너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 문을 열고 나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지만 돌아가더라도 이미 돌아갈 곳은 없다는 생각.
은주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문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예상보다 너무 일상적이었다. 그 평범함이 오히려 은주의 다리를 풀리게 했다. 순간,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아까 통화했던…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말끝이 흐려졌다. 문이 열리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은주는 벽지의 무늬를 똑바로 바라봤다. 나뭇잎 모양의 패턴 하나하나를 기억해두려는 것처럼.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여자의 헝클어진 머리는 수세미처럼 부풀어 있었다. 잠에서 막 깬 얼굴이었다. 헐렁한 원피스 아래로 불룩 튀어나온 배. 그 모습과는 달리 집 안은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바닥에 먼지 하나 없었고, 가구들은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이 집은 누군가의 생활을 숨기기 위해 정리된 것처럼 보였다.
“직원분이 오시는 줄 몰랐어요… 딜리버리인 줄만 알고…”
여자는 자신의 모습을 의식했는지 머리를 풀어 다시 묶었다. 고무줄을 두 번 감는 손길이 익숙해 보였다. 오래 함께 산 사람의 습관 같았다.
“여기… 보내신 꽃이랑 선물입니다.”
은주는 석영이 늘 하던 방식 그대로 붉은 장미 한 다발과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전날 미리 사두었던 귀걸이가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이 장면을 상상해본 적이 있었을까. 아니면, 상상하지 않으려 애써왔던 걸까.
“어머… 웬일이래요. 꽃에… 사람까지 다 보내고…”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긴 했나 보다. 그이는 오늘도 바쁘죠? 깔끔한 사람이긴 한데, 주말에나 오니까 늘 걱정이에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주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옆에 있던 의자를 꽉 붙잡았다. 손끝에 닿은 나무의 결이 선명했다. 석영의 휴대전화에서 보았던 문장이 머릿속을 스쳤다.
여보, 이사한 집 주소야.
애들하고 이사 잘했어.
아이들 얼굴, 새집 내부 사진. 그리고 며칠 전 석영과 침대에서 나누던 장면이 겹쳐졌다. 그의 셔츠를 벗기던 손, 허리를 끌어당기던 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고르던 모습. “오늘은 좀 늦어.” “주말엔 힘들어.” 그 말들이 같은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은주의 숨을 막히게 했다.
여자는 계속 말을 하고 있었다. 은주는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봤다. 특별할 것 없는 얼굴이었다. 기미가 올라온 피부, 늘어진 옷, 오래 입어 흐트러진 원피스. 흔하디흔한 아줌마의 모습. 그런데도 석영은 이 여자에게 ‘여보’라고 불렀다. 은주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여자는 커피와 과일을 내왔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 그 모든 동작이 너무 일상적이어서, 은주는 오히려 숨이 막혔다. 여자는 쉼 없이 말을 했다. 오래 묵혀둔 외로움을 아무에게나 쏟아내듯 이야기했다. 은주는 여자가 밉기도 했고, 가엾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대신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가 더 분명해졌다.
자리를 뜨겠다고 말했을 때 여자는 배웅을 하겠다고 했다. 은주는 거의 떠밀다시피 여자를 집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 없었다. 다시 계단이었다. 내려가는 발걸음이 올라올 때보다 훨씬 무거웠다.
‘사실이면 꼭 알려주겠다’고 다짐했지만, 문 앞에 서 있던 여자를 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여자가 벌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모든 걸 알면서도 그 침대에 올라갔던 자신이 더 분명해졌을 뿐이었다. 벤치에 앉아 지하철을 기다리며 은주는 고개를 숙였다. 석영에 대한 분노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비난이 더 컸다. 구질하고 볼품없는 여자는, 결국 나였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