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마거렛 렌클
책이 배송되어오자마자 서너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용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한 문장, 한 문장 눈으로 짚으며 소리 내어 읽었고, 속도도 적당했다. 하지만 읽은 페이지에 글자가 없었던 듯, 남은 문장은 없다. 느낌만이 스며 있다.
문장의 흐름이 매끄러워서였을까.
보트를 타고 잔잔한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페이지를 다시 돌아가 읽으려다 멈췄다.
나의 껍데기를 뚫고 어디엔가 스며들었을 것 같았다.
이런 글이 좋다.
독자에게 무엇을 남겨야겠다는 의도를 빼곡히 숨겨둔 글이 아니라, 흘러가듯 스며드는 글.
가끔 그런 글을 본다.
작가가 자신의 의도가 보이지 않을 거라 착각하며 써 내려간, 오만한 문장들.
명언을 쥐어짜듯 만들어진 글귀를 책의 대문처럼 우뚝 세우는 글들.
읽고 나면 속이 메스꺼워진다.
그런 글에는 작가의 진솔함도, 영혼의 가벼움도 없다.
단어와 문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작가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지도, 꾸중을 듣고 싶지도 않다.
다만, 작가의 의식에 기꺼이 지배당하고 싶다.
최선을 다해 자신이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엮어낸 문장들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로잡힌다.
그것은 글을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쏟아 넣으려 애쓴 흔적이다.
나는 작가의 사생활이 궁금하지 않다.
그의 이력도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이 독자의 심장을 붙드는 지름길이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오만이다.
책은 내게 휴식이어야 하고, 영혼의 밥이어야 하고, 때로는 오락이어야 한다.
내가 읽는 글은 나의 부족한 글보다 조금은 더 의식이 있어야 하고,
조금은 더 자유로워야 하고,
조금은 더 무지갯빛이어야 한다.
나는 타인의 글을 읽는 시간을 옳고 그름에 투자하지 않는다.
글에 취해 한나절을 보냈다.
무의식 중에도 읽히는 책을 만난다는 건 기쁜 일이다.
책을 얼마만큼 읽겠다는 의지는 없다.
나는 취했고, 허기졌다.
배고픔이 달래질 때까지 읽고, 멈추면 멈출 뿐이다.
마거릿 렌클의 우리가 작별인사를 할 때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문장에서 멈칫하고 사유를 내려놓을지 알 수 없다.
조금 더 읽어보니, 그녀의 글에는 사람의 냄새가 묻어 있다.
여인의 향기가 스며 있고, 겸손과 현명함의 입김이 닿아 있다.
그녀의 문장 속에는 자연과 인간, 사랑과 상실이 조용히 녹아 있다.
숲과 새, 강과 햇살 같은 것들이 그녀의 이야기와 얽혀 있다.
그녀는 자연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과 떠나보내는 것을 이야기한다.
"나는 구멍이 너무도 많은 집 안에 깨어 있고, 나와 어두운 세상 사이에 놓인 것은 녹슨 방충망—그리고 내 옆 침대 속의 노부인—뿐이다." (P.065 본문 중에서)
공허한 공간에서 나의 존재를 깨닫는 순간이 있다.
그녀는 얼마나 많은 순간,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깨달았을까.
그녀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상실이 단순한 슬픔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건 깊은 애정의 다른 얼굴이다.
이 책은 단순히 삶과 죽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는 하나를 잃고도 그 자리에 남은 것들을 바라본다.
떠난 자리에 피어난 풀 한 포기, 그늘을 만들어 주던 나무,
오래된 기억 속에서 다시금 살아나는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
"상실의 끝에서, 나는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다." (P.198 본문 중에서)
나는 지금, 그녀의 문장에 녹아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