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쉼은 모든 곳에 존재하며 어떤 곳에도 존재하지 않을 허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부드럽게 시간을 타고 흐르는 듯하지만 속성은 거칠고 인색한 삶에서 쉼이란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가.
그럼에도 나는 끊임없이 쉼을 추구하고 동경한다. 하는 일 없이 심심하게 보내는 날에도 따로 쉼을 갖기를 원한다. 쉰다는 것은 어떤 상태에서도 쫓기지 않고 머물지 않으며 숨이 안정되게 쉬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갑갑한 부분이 허파인지 심장인지 모를 가슴의 답답함이 없는 상태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쉼의 또 하나의 꼭지로 독서를 선택했다. 이십 대에 버렸던 행위를 다시 찾게 된 것은 살아남고자 하는 몸부림의 일부였다. 윤동주의 시는 순수한 영혼의 절규와 같이 나의 심장을 두드렸다. 알베르 카뮈와 쇼펜하우어는 철학에 대한 물음을 던져 주었고 존 윌리암스는 나만의 언어에 대한 갈증을 심어주었다.
나는 감탄하는 어떤 대작가의 책에도 읽으면서 밑줄을 긋지 않는다. 알베르 카뮈의 수려하지만 넘치지 않는 문장과 페르난두 페소아의 절묘하게 이어지는 심연의 글을 내가 잘라낼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나는 감히 그들의 글을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들의 글은 명언처럼 밑줄을 그어 새길 수 없다. 첫 글자부터 마지막 글자까지 하나의 문장이며 뇌에 새기고 가슴에 새겨지는, 내 몸 가장 따뜻하고 명료한 자리에 새겨지는 향연이다.
그들의 글을 읽고 내가 기억하는 것은 글에 대한 진정성과 철학이라 불릴만한 것들이다. 조금의 막도 느껴지지 않는 정직한 글솜씨이다. 껍데기에 감탄하는가? 누군가 묻는 다면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질문이다. 문장 하나를 기억을 하고자 그들의 책에 밑줄을 긋는 행위야 말로 껍데기를 뒤집어쓰고자 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다.
밑줄을 그으면서 읽다 보면 글의 맥락이 아니라 문구 한 줄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것은 물속에 잠깐 발을 담그고 물의 깊이와 물고기들의 종류와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나는 반복해서 그들의 글을 읽을 의향이 있다. 가능해서 통째로 그들의 사색과 문장에 담긴 뜻을 간직하고 되뇔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참 신기한 건 결코 가볍지 않은 그들의 책 속에 나의 쉼이 있다는 사실이지만 더 신비로운 건 나의 현실적인 견해와 추상적인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나는 그들을 존중하지만 감히 그들을 질투하고 염탐하고 비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