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마거릿 렌클
책을 읽으면서 불편한 마음이 들면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책을 덮는다.
불편한 책이 싫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책도, 삶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책도 내키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마거릿 렌클의 『우리가 작별인사를 할 때마다』를 읽는다는 것은 휴식의 일종이었다.
렌클은 특별한 이야기를 쓰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보는 자연은 내게 남달랐다.
파랑새 새끼들의 쉽지 않은 부화 이야기,
연못을 질식사시키는 수련의 이야기.
내가 살아본 적 없는, 다른 우주의 생존 이야기들.
렌클이 바라보는 자연은 따뜻하고 가깝지만, 신비로운 세상이다.
"하늘에서는 기적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은 평범한 뒤뜰의 축축한 잡초 속에서,
작년의 바스러진 나뭇잎과 두더지가 파헤쳐서 드러난 향기로운 흙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P.034)
이 책은 사람이 속한 자연의 이야기이면서도,
자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한 가족의 서사다.
외할머니가 들려주는 가족의 이야기는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을 때 솔솔 불어오는 나지막한 바람 같다.
렌클의 시선은 감정적이지 않다.
그 담백함이 한 가족의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오히려 궁금하게 만든다.
렌클의 어린 시절을 읽는 동안,
나는 생명이 가득한 작은 숲에 있는 듯했다.
삶과 죽음, 생명의 움직임이 가득한 숲.
그 숲은 그녀의 위안이며 안정감이다.
"때때로,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절망적인 세계 뉴스가 더 절망적으로 다가올 때,
이곳에 속해 있다는 무게는 떨쳐내기 힘든 중압감이 된다.
그럴 때 나는 어느 봄날 아침의 반짝임을 생각한다.
햇살 속에 서서 나비 정원에 물 주는 것을 생각한다." (P.102)
나는 렌클이 있는 곳에 완벽히 함께 있었다.
책 속에 누웠고, 상상의 동물 같은 생명들을 관찰했다.
죽음의 이야기를 읽는 순간에도
나는 그녀가 곳곳에 남겨둔 생명의 이야기들을 잊지 않았다.
렌클은 많은 죽음을 보여주었다.
외할머니가 전하는 외외증조부의 죽음,
외할머니가 전하는 외할아버지의 죽음,
외할머니가 전하는 외외증조할머니의 죽음,
최고학년 봄의 선생님의 죽음,
아끼던 왕관앵무새의 죽음까지.
그녀는 삶을 받아들이듯, 죽음도 삶의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아이는 도로 위에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새를 보았다.
아이는 날지 못하는 새는 새가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결국 엄마 렌클로부터 ‘죽은 새’라는 단어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모든 생명의 죽음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묻는다.
'내가 죽을까요?'"**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생명이 사그라드는 순간에도, 삶은 지속된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요란하지 않다.
**"땅이 시들어 간다.
하지만 하늘은 서쪽에서 빨간색과 주황색과 노란색이 짙어지면서
붉어 갈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가을, 잠깐 동안의 꿈속에서
햇빛이 단풍나무의 헐벗은 나뭇가지 속 하늘을 포착하고 옷을 입힌다.
온통 분홍색이고 적갈색이고 황금색이다.
가까운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던 홍관조가 광채를, 불꽃을 터뜨린다.
그리고 그 순간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
흙도, 달가닥거리는 나뭇가지도,
홍관조가 시간 맞춰 지면으로 내려앉는 방식도,
차가운 돌도 아직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나도, 내 일족도 냉담해질 것이다."** (P.156)
이 책의 첫 페이지에는 렌클의 모계 가계도가 나온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것이 이 책의 모든 것이었다.
렌클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과 가족, 삶과 죽음에 속해 있는 작가였고,
그것을 소중히 여겼다.
한때, 나도 가족과 관련된 내 삶의 일부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 적이 있었다.
그것이 마치 20대 이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인 것처럼.
그 시기를 지나면서 깨달았다.
벗어나려는 그 순간부터, 나는 내 가족의 누구와도 멀어질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존재하는 곳이 삶이고,
삶이 존재하는 곳에 내가 있다.
가족은 삶의 일부이며, 전부이기도 하다.
타인의 세계를 통해 나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그런 책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