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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에 밑줄 긋기?

by 보나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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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쉼은 모든 곳에 존재하며,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허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부드럽게 시간을 타고 흐르는 듯하지만, 속성은 거칠고 인색한 삶 속에서 쉼이란 어울리지 않는 단어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끊임없이 쉼을 추구하고 동경한다.
하는 일 없이 심심하게 보내는 날에도 따로 쉼을 갖기를 원한다.
쉰다는 것은 어떤 상태에서도 쫓기지 않고, 머물지 않으며, 숨이 안정되게 쉬어지는 것.
갑갑한 부분이 허파인지 심장인지 모를 가슴의 답답함이 없는 상태.

언젠가부터 나는 쉼의 또 다른 형태로 독서를 선택했다.
이십 대에 버렸던 행위를 다시 찾게 된 것은 살아남고자 하는 몸부림의 일부였다.

윤동주의 시는 순수한 영혼의 절규처럼 나의 심장을 두드렸고,
알베르 카뮈와 쇼펜하우어는 철학에 대한 물음을 던져 주었다.
존 윌리엄스는 나만의 언어에 대한 갈증을 심어주었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지 않는다.
아무리 감탄하는 대작가의 책이라 해도,
나는 문장을 잘라내고 싶지 않다.

카뮈의 수려하지만 넘치지 않는 문장.
페소아의 절묘하게 이어지는 심연의 글.

그들의 문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유기적인 흐름이다.
단순한 문구로 분절될 수 없는, 온전한 사유의 덩어리.

나는 감히 그들의 글을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들의 글은 명언처럼 밑줄을 그어 새길 수 없다.
첫 글자부터 마지막 글자까지 하나의 문장이며, 뇌에 새기고 가슴에 새겨지는, 내 몸 가장 따뜻하고 명료한 자리에 새겨지는 향연이다.

그들의 글을 읽으며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문장들이 아니다.
글에 대한 진정성.
철학이라 불릴 만한 깊이.
조금의 막도 느껴지지 않는 정직한 글솜씨.

누군가 묻는다.
“껍데기에 감탄하는가?”
나는 말하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질문이다."

문장 하나를 기억하고자 밑줄을 긋는 행위야말로,
껍데기를 뒤집어쓰려는 것 아닐까.

밑줄을 긋다 보면 글의 맥락이 아니라,
문구 한 줄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것은 물속에 잠깐 발을 담그고서,
그 깊이와 물고기들의 존재를 모두 알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나는 반복해서 그들의 글을 읽을 의향이 있다.
가능하다면 통째로 그들의 사색과 문장에 담긴 뜻을 간직하고,
되뇔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참 신기한 건, 결코 가볍지 않은 그들의 책 속에서 나의 쉼을 찾는다는 사실이다.
더 신비로운 건, 그들의 글을 읽는 순간, 나의 현실적인 견해와 추상적인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나는 그들을 존중한다.
하지만 감히 그들을 질투하고, 염탐하고, 비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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