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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나쓰 Sep 03. 2024

다시 만나는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페리는 작가이자 비행사였다. 그는 비행 중 실종되었다. 나는 밤하늘의 별 속으로 사라져 갔을 그를 주인공으로 여기며 이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가 비행기를 타고 만났을 어린 왕자를 나는 열일곱쯤에 처음 만났던 거 같다. 내가 어른이 되는 동안 여전히 자라지 않고 있는 왕자님을 다시 한번 알현하고자 한 건 내 이성과 감각의 성장을 느껴보고 싶어서이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그림은 보아뱀의 뱃속인가. 모자 속에 숨은 코끼리인가.


열일곱의 나는 무엇을 보았을까. 지금의 나는 보아뱀과 코끼리를 함께 보지 못했다. 내게는 늘어진 니트 안에 숨어있는 코끼리가 보였을 뿐이다. 그림 안의 코끼리는 어떤 소리에 집중하는 듯 눈을 살짝 치켜뜨고 있다. 어른의 이해를 받지 못한 생텍쥐페리는 작가이자 비행사가 되었고 나의 상상력을 이해받지 못하는 나는 작가가 되는 중이다. 


비행기가 추락한  사막에서 왕자가 조종사에게 그려준 양이 들어가 있는 직사각형 상자를 나는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세 개의 구멍 중에서 가운데 구멍에 무언가 나를 내다보고 있는 듯했다. 실제로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양이라고 믿었고 확실히 양이 있네 하면서 그 상자가 갖고 싶기까지 했다.


"이걸 타고는 그렇게 멀리서 오지 못했겠는걸."


왕자가 비행기를 보며 한 말이다. 너무나 맞는 말이다. 비행기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곳을 갈 수 없다. 우주라고 발견한 각종 별들을 그려 놓은 곳들에 조차 다다를 수 없다. 그저 대기권 안의 상공을 날아다닐 뿐이다. 지구의 시간개념 속에 있는 나라들 사이를 항로를 따라오고 갈 수 있을 뿐이다. 


집 한 채 크기밖에 안 되는 소행성 B612호의 주인


숫자와 거리 등을 명시하고 유럽식의 옷을 입은 천문학자가 설명해야 존재를 인정받는 작은 별들의 별들 속에 왕자의 집, 소행성 B612가 있다. 그 별은 어른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인정받지 못할 듯한 작은 별이다.


나의 소행성을 떠올렸다. 내게도 별이 있었는데... 그 별에는 익숙하지 않은 로코코시대의 드레스로 여겨지는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작은 공주가 있었다. 공주에게는 큰 거울이 있었지만 한 번도 거울을 들여다본 적은 없다. 공주는 그저 존재했고 자신의 키 세 배정도 되는 왕좌에 앉아 아무도 알현하지 않는 알현실에서 왕녀가 되었다.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그녀에게는 넓고 넓은 정원이 있었다. 정원에는 다양한 그렇지만 지구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꽃들과 나무와 곤충과 동물이 놀고 있었다. 언제 그 별을 떠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떠날 때 공주를 그 별에 혼자 내버려 두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바오밥 나무를 베었나


어느 때까지 나는 장미와 비슷한 어린 바오밥나무를 보았겠지? 뽑아 버렸어야 할 바오밥나무를 자라게 두었을지도 모른다. 내 별의 바오밥나무는 미세하게 자라면서 나의 영혼을 조각내려 했을지도 모른다. 먹혀 버린 부분은 아예 기억에 조차 남지 않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흠칫 소름이 돋고 내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 보이지 않는 아쉬움이 느껴지며 허전해진다.


"언젠가 이 별에 사는 아이들이 여행하게 될 때, 그 그림이 도움이 될지도 몰라. 가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게 괜찮을 때는 있지만, 바오밥나무 같은 경우 끔찍한 결과를 불러와. 한 게으름뱅이가 살고 있는 별을 알고 있었어. 게으름뱅이가 작은 나무 세 그루를 그냥 내버려 두었는데 결국...." P.32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


나는 얼굴이 발간 사람이 살고 있는 어떤 별을 알고 있어.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꽃향기를 맡아본 적이 없지. 별을 바라본 적도 없어.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도 없고. 계산 말고는 아무 일도 해본 적이 없어. 그 사람은 하루 종일 아저씨처럼 '나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야. 나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같은 말만 되풀이하면서 거만함에 가득 차 있어. 하지만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야. 버섯이라고! P.38


나는 내가 무엇인지 혹은 어떤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사람임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중요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생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의미도 된다. 


살면서 발버둥 치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에 나는 오랫동안 괴로워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매일매일 고민을 해도 알 수 없었던 결과를 어느 한 날, 한 순간에 마치 햇살을 처음 본 것처럼 깨달았다. 나는 그다지 의미 있는 일에 나를 소모하고 있지 않았다는 걸.


나는 무모했고 무리했으며 소모했고 헐벗은 마음을 가진, 사람의 대우를 받고 싶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누구도 내게 요구하지 않았고 권리가 없었던 일에 대해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처럼 몰두했고 상처받았다. 나를 토닥이던 날에 내가 흘렸던 눈물과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그 가벼움을 기억한다. 


내게 중요한 일이 장미를 사랑하는 일이었다면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줄 몰랐던 거야! 꽃의 말이 아닌 행동을 보고 판단했어야 했어. 그 꽃은 내게 꽃향기를 주고, 내 마음을 환하게 해 주었어. 내가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어! 서툰 거짓말 뒤에 숨겨진 부드러움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꽃은 정말 모순 덩어리야! 하지만 난 너무 어려서 꽃을 사랑할 줄 몰랐던 거야." P.46


사랑이 깊이 가슴을 두드리던 문장이다. 나는 사랑에 지쳐 사랑을 찾아 헤매고 사랑을 그리워하던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알고 있고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은 허상이었고 호랑이도 이길 수 있는 가시만 보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장미의 몸치장과 앙칼진 태도가 아닌 향기로운 자태와 몸짓만을 보았어야 했나. 장미를 버리고 떠난 게 돌아오기 위함이었다면 그것은 좋다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해야 할까. 중요한 것을 반드시 잃어 보고 나서야 깨달을 필요는 없다. 잃지 않고는 알 수 없다면 황량함을 남기더라도 잃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별을 떠나 만난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


어린 왕자가 처음 떠난 별에서 만난 왕은 우주의 군주였으며 꽤 합리적인 왕이었다. 늙은 왕은 자신이 앉아 있는 별의 유일한 종이었으며 국민이었으며 폐하였다. 그의 명령은 어린 왕자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고 어린 왕자는 떠나기 위해 왕으로부터 대사직을 임명받았다. 


두 번째 떠난 별에서는 허영심에 빠진 사람을 마주쳤다. 그는 찬미받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자신을 찬미하는 말 외에는 듣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린 왕자는 그의 모자를 벗겨주기 위해 벗는 방법을 물었지만 찬미가 중요한 그는 오로지 허황된 기쁨만을 어린 왕자에게 요구했다.


다음 별에서는 술꾼을 만났다. 이 술꾼은 자신이 술꾼이라는 게 부끄러워 술을 마시는 사람이었다.


네 번째 별에서는 사업가를 만났다. 사업가는 주인 없고 이름 없는 별들을 모두 소유한다고 말했다. 소유할 뿐 그는 어떤 정성도 그 별에 들이지 않았고 유익함도 주지 않았다. 그는 소유할 뿐이었으며 소유한 별의 숫자를 셀 뿐이었다. 그가 별을 소유하는 목적은 다른 별을 사기 위함이었다.


다섯 번째 별에는 가로등을 켜고 끄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명령을 받아 일을 한다.  별은 회전 속도가 빨라져 점점 더 시간이 빨리 흘렀고 그는 이제 일분마다 불을 켜고 끄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왕자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왕자는 스물네 시간 동안 천사백사십 번의 일몰을 보고 이 별을 떠났다. 


여섯 번째 별은 열 배나 큰 별로 한 노인이 거대한 책을 쓰고 있는 지리학자를 만났다. 지리학자는 탐험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신은 기록만 할 뿐 지리에 대한 정보를 가져오는 일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지형을 기록하는 일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장미같이 사라지는 것들을 '덧없는' 것이라 하였다.


일곱 번째 별은 지리학자의 추천으로 닿은 지구였다. 인간이 지구에서 차지하는 공간은 아주 작지만 자신들이 바오밥나무처럼 중요하다고 믿는 어른들이 굉장히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살아간다고 믿는 별이다. 아프리카의 사막에서 왕자는 뱀을 만난다. 뱀은 배보다 더 멀리 어린 왕자를 데려다줄 수 있다고 말한다.


왕자의 발목을 감으며 뱀이 말한다.


"내가 손대는 것은 무엇이든 자기가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게 돼. 하지만 너는 순수하고 별에서 왔으니까..." 


사막여우를 만나다.



왕자는 사막을 가로질러 걷다가 장미꽃이 잔뜩 피어있는 정원을 만났다. 그는 특별하다고 믿었던 장미가 흔하디 흔한 꽃들 중의 하나라는 걸 깨닫고 울어 버린다. 바로 그때, 여우가 나타났다. 


사막의 여우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여우는 말한다.


"나는 너와 놀 수 없어. 난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P.95


길들여진다라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고 특별해지는 거라고 여우는 왕자에게 말한다. 어린 왕자에게 길들여진 장미와 장미에게 길들여진 어린 왕자의 관계가 결정지어지는 순간이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건 함께 시간을 보내고 보살펴 줄 수 있다는 의미였구나.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햇빛을 받는 것처럼 환해질 거야.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발소리와 다른 네 발소리를 구별하게 되겠지. P.97


사람들에게 시간과 의식이 없다.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무언가를 알기 위한 시간이 없어. 사람들은 상점에서 다 만들어진 것을 사거든. P. 98


사람들은 무언가를 갖기 위해 더 이상 인내하지 않으며 삶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의식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숫자에 매몰되고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의 룰에 쫓기고 서로에게 쉴 수 있는 여유와 마음조차 줄 수 없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길들여지는 시간과 인내는 '일상의 허비' 일 뿐이다. 행복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여우가 안내하는 행복의 의식에 잠시 머릿속을 맡겨 본다.


"네가 만약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할 거야.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가 되면 흥분으로 안절부절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게 되겠지! 하지만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난 언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를 거야... 그래서 의식이 필요한 거야." P.98


여우를 길들이는 의식을 진행한 왕자는 진정한 중요함과 특별함을 알게 되고 정원의 장미꽃들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특별함은,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왕자는 되뇐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P.101

"내 장미꽃을 위해 내가 보낸 시간 때문이야..." P.102

"나는 내 장미꽃에 대한 책임이 있어..." P.102


"별들이 아름다운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꽃 한 송이 때문이야."


왕자는 여우가 가르쳐준 것을 잊지 않았다. 사막에서는 물을 찾지 못하면 죽는다. 어린 왕자는 물을 찾지 못해 죽을듯한 순간에도 중요한 것을 잊지 않았다. 죽게 되더라도 친구를 갖는 건 좋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린 왕자는 별이 아름다운 이유도 두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도 알고 있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P. 108


조종사와 어린 왕자가 발견한 물은 '마치 축제처럼 달콤했다.' (P. 113)에서 나는 갈증을 느꼈다. 언제 마지막으로 그런 물맛을 느꼈었나. 힘겨웠던 이유조차 잊을 만큼 달콤한 그 축제 같은 물을 언제 마신 적이 있었나.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나는 어른이 되었다. 슬픔이 밀려온다. 


왕자가 코끼리를 먹은 보아뱀이라고 설명을 해도 모자 외에는 볼 수 없는 메마른 인식을 가진 어른들의 세계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몸만 바삐 움직이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나는 이방인이 되고 싶다.


나는 오늘 밤 깜깜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린 왕자와 장미와 양의 이야기를 상상해 보겠지. 잃어버리는 것은 영원히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운 좋게 되돌아오는 것도 있다. 내게 오늘 되돌아온 소중함은 보이지 않지만 내 삶의 가치를 둔 자리를 조금은 옮겨 줄 거라 기대한다. 그렇게 조금씩 옮기다 보면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육안으로는 아예 보이지 않게 되겠지만 무엇보다 선명하게 존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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